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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원응두 (2) 일제시대 학교서 개명 강요… 한겨울엔 맨발 등교까지

선생님 첫 마디가 “조선말 쓰지 말라”
이유도 모른 채 일본 향해 묵념
부모들도 군사 기지서 강제노역
1945년 드디어 해방의 신새벽 맞아

제주 중문초등학교 21회 동기들과 은사님을 모시고 기념촬영을 했다. 뒷줄 왼쪽 두 번째가 원응두 장로.

나의 어린 시절은 일제의 압박을 당하던 민족의 수난 시기였다. 어렵사리 초등학교에 입학해 보니 너무나 신기했다. 선생님이 하신 첫 마디가 ‘조선말을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학교에서는 일본어를 사용했고 여러 가지 과목도 일본어로 배웠다. 교복도 일본 군인들이 입는 옷과 색깔이 비슷했다. 모자도 마찬가지였다. 성명도 일본식 이름으로 바꿨다. 모든 것을 일본식으로 하는 것이었다. 나는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성적이 나쁘면 낙제를 시켜 한 해 더 공부하도록 했다. 지금 기억하면 신체 단련이라고 하여 아이들을 겨울에 반바지에 맨발로 학교에 가도록 하고, 여름에는 상의를 벗고 다니도록 했다. 피부는 햇볕에 까맣게 태우도록 했다. 그래야 건강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매주 월요일이면 신사참배를 하게 하고 정오에는 일본을 향해 묵념하도록 했다.

나는 어려서 잘 모르고 자랐지만 부모님은 정말 어렵고 힘든 세월을 보낸 것 같다. 그래도 내 기억 속에는 가난하고 어려웠지만, 우리를 사랑해 주시던 부모님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시절은 당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겪었던, 힘들고 고달픈 세월이었다. 나도 어린 나이에 이곳, 제주 중문에서 똑같이 어려움을 겪으며 자랐다.

부모님들이 일제의 탄압 속에서 고통당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어린 나에게도 너무나 분하고 원통한 생각이 든다. 일제는 부모님들이 1년 내내 애쓰며 농사한 것들을 공출이라고 해서 빼앗아 가고 기르던 소와 돼지, 닭 같은 가축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갔다. 심지어 집에 있는 쇠로 된 가재도구들도 몽땅 가져갔다.

면에서는 직원들이 나와 주민들이 어떤 음식을 해 먹었나 솥뚜껑을 열어보며 확인까지 했다. 동네 남자 어른들은 일본 군인들이 주둔한 모슬포 군 기지에 동원돼 땅굴을 파고, 대포기지를 만드는 데 강제 노동을 했다. 그리고 산이나 오름에 동굴을 파는 일에도 동원돼 고생했다. 젊은 여자들은 일본에 취직시켜 준다고 하면서 끌고 가기도 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고야 말았다. 해방은 역시 새벽같이 왔다. 3학년 중반쯤 일본어 히라가나를 배울 무렵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아침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학교 분위기가 이상했다. 운동장에 들어서자 우리말로 애국가가 들려오고 우리말 동요가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일본 선생님들은 보이지 않고 대신 우리나라 선생님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일본인 교장도 보이지 않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지금까지 사용하던 일본 교과서를 모두 반납하고 새로운 한글 교과서를 받았다. 처음에는 아주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찾아온 해방으로 모든 것이 변했다. 자유롭게 학교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어린 나이로서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한글 교과서로 기역 니은 디귿 하면서 한글을 처음으로 배웠다. 노래도 우리말 동요로 배웠고 노래에 맞춰 율동도 배웠다. 나는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어서 좋았다.

정리=윤중식 종교기획위원 yunj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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