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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창일 기자의 미션 라떼] 일제 강제동원 해법을 곱씹다

85년전 신사참배 결의한 장로회와 오늘

일본군 성 노예제 해결을 위한 제1586차 수요시위 참가자들이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인근에서 ‘졸속외교’ 등 문구가 적힌 상자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1938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신사참배란 일본인들이 신으로 여기는 ‘천황’에 복종하는 명백한 종교 행위다. 이미 일본은 우리나라에 2개의 신궁과 1062개의 신사를 세우며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장로회를 압박했다. 천주교와 감리교 등은 이미 신사에 허리를 굽힌 뒤였다.

장로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건 제27회 총회 때였다. 당시 평양 서문밖교회에 목사와 장로, 선교사로 구성된 190여명의 총대가 모였다. 우리나라 기독교인이 40만명 남짓으로 이 중 70%인 28만여명이 장로회 소속 교인이었다.

평양노회장 박용률 목사가 신사참배에 찬성하자는 내용의 ‘긴급동의안’을 제출하자 사전에 약속한 총대들이 앞다퉈 발언하며 일사천리로 안건을 통과시켰다. 홍택기 총회장은 “‘가’(可) 하면 ‘예’ 하시오”라고 물었다. 통상 회의 규칙 중 하나인 거부 의사를 묻는 과정은 생략했다.

“딱, 딱, 딱.” 의사봉을 세 차례 내리친 총회장은 신사참배가 결의됐다는 사실을 알렸다. 윌리엄 블레어 선교사를 비롯한 현장의 선교사들이 “불법이다”고 외치며 강단을 향했지만 곧바로 총회를 감시하던 경찰들에게 제압당했다.

장로회 총회는 미리 신사참배 결의에 대한 선언문까지 준비했다. 안건 상정이 긴급동의 형식을 띠었을 뿐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했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다. 선언문에는 신사참배가 다른 신을 섬기는 죄가 아니라는 변명이 담겼다.

“신사는 종교가 아니며 기독교 교리에도 어긋나지 않는 애국적 국가 의식이기에 솔선해서 국민정신 총동원에 적극 참여하여 황국신민으로서 정성을 다해 달라.”

한 번 꺾인 지조는 걷잡을 수 없는 속도와 방향으로 치달았다.

주요 교단 총회는 교인들을 상대로 국방헌금을 걷었고 전쟁 승리를 위한 기도회, 시국강연회, 전승 축하회, 위문행사 등을 연이어 열며 군국주의 일본을 찬양했다. 장로회는 일제를 위한 기도회만 8953회 진행했을 정도였다.

급기야 교회는 살상 무기를 헌납하기에 이르렀다. 1942년 장로회는 전투기(조선장로호) 1대와 기관총 구입비를 일제에 헌납했다. 감리교는 물량 공세에서 장로회를 압도했다. 1944년 열린 감독회의에서는 ‘감리교단호’로 명명된 전투기 3대를 살 돈 21만원을 헌납하기로 했다.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특별헌금을 걷은 건 물론이고 이웃한 교회를 통폐합한 뒤 부동산을 처분했다.

일제 말 교회가 적극적인 부역 행위에 나섰던 건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다’는 거짓 논리 때문이었다. 신사참배조차 종교의식이 아닌데 더이상 못할 일이 없었던 셈이었다.

일찍이 이완용이 매일신보에 쓴 글의 논리도 공허할 뿐이다.

“조선이 식민지가 된 것은 구한국이 힘이 없었기 때문이며 역사적으로 당연한 운명과 세계적 대세에 순응시키기 위한 조선 민족의 유일한 활로이기에 단행된 것이다.”

전 국민이 일제의 압제에 항거했던 3·1운동이 일어난 지 104주년이 됐다. 총칼 앞에 평화적인 만세시위로 독립을 외쳤던 선조들의 저항정신만 기념해도 부족할 시간인데 여러 논란이 기념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다.

일제에 의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을 한국 기업이 한 뒤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설정하자는 정부 논리가 논란의 중심에 있다. 일본에 또다시 너무 많은 걸 양보한 건 아닌지, 이런 혼란을 딛고 과연 정부의 바람대로 양국의 희망적인 미래 청사진을 그릴 수 있을지 의문이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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