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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동철 칼럼] 노동개혁 첫 단추 잘못 뀄다


근로시간제 개편 노동계·야권
반발에 입법 혼선 겹쳐 삐그덕
소통 부족보다는 장시간 노동
공짜 야근 우려가 근본 원인

지금도 과로사회인데 연장근로
한도 더 늘리는 방식은 노동자
권익에 반해 지지 받기 어려워

노동시간 줄이는 국제적 흐름
거스르지 말고 비효율 줄이되
생산성 높여온 선진국들의
보편적인 개혁 방식 고민해야

윤석열정부 노동개혁 1호 과제로 추진한 근로시간제도 개편의 발걸음이 꼬였다. 연장근로 관리 단위를 월, 분기, 반기 등으로 변경해 주당 근로시간을 현행 최대 52시간에서 69시간으로 늘리는 내용의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지난 6일 입법예고했는데 노동계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MZ세대 노조마저 개편안에 반대하자 윤 대통령이 보완을 지시했고 고용노동부는 ‘주 69시간제’ 수정 작업에 들어간 상태다. 노동계와 야권이 반대했는데 입법 과정에서 혼선까지 겹쳐 개편 동력이 떨어지는 모양새다. 여권은 개편안에 대한 홍보 부족과 그로 인한 오해, 악의적 흔들기 탓이라 여기는 기류인데 과연 그게 이유일까.

고용부는 근로시간제 개편이 노동자의 선택권·건강권·휴식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업무량이 몰리면 평소보다 더 많이 일하고 그렇지 않은 기간에 그만큼 더 많이 쉬면 노동자의 삶의 질이 더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동계의 생각은 다르다. 근로시간 상한을 높이면 장시간 노동으로 내몰리고 가뜩이나 취약한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무너질 수 있다는 입장이다. 주 69시간은 주 6일 근무라면 하루 11.5시간꼴이다. 4시간마다 30분이 주어지는 휴식시간을 합쳐 하루 13시간을 일터에서 지내야 한다. 주 60시간도 6일 내내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8시30분까지 일해야 한다. 출퇴근 시간, 잠자는 시간까지 감안하면 퇴근 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

우리나라는 연간 근로시간이 2021년 기준 1915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중 다섯 번째이고 OECD 평균(1716시간)보다 199시간이나 많다. 독일(1349시간)의 1.4배이고 일본(1607시간)보다도 무려 308시간 많다. 관리 단위가 길어질수록 연장근로 총량을 줄이는 장치를 둬도 상한을 높이면 ‘몰아치기 노동’이 빈번해져 건강권과 삶의 질이 나빠질 가능성이 높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보사연)은 주 60시간 이상 근무한 노동자는 그렇지 않은 노동자보다 심혈관질환 발생 위험이 47.7%, 정신질환은 28.8% 높아진다고 밝힌 바 있다.

노사 합의가 전제되기 때문에 노동자가 연장근로 선택권이 있다는 게 정부의 주장이지만 노동계는 고개를 내젓는다. 노조 조직률이 14.2%에 불과하고, 대다수 중소·영세 사업장에 노조가 없는 상황에서 근로자가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을까. 일감이 몰려 연장근로를 하자고 하면 개인 사정이 어떻든 받아들이거나 그게 싫다면 직장을 떠나야 하는 게 현실이다. 연장근로에 따른 보상이라도 제대로 이뤄진다면 그나마 모르겠으나 이마저도 불투명하다. 보사연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1년 임금근로자의 휴가 일수는 평균 17.03일인데, 실제 사용한 건 11.63일에 그쳤다. 이런 여건에서 연장근로시간을 저축해 장기휴가를 가게 하겠다는 보상안은 공허하다. 포괄임금제 적용 기업들, 노조가 없고 근로감독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영세기업 노동자들은 일을 더 하더라도 보상은 받지 못하는 ‘공짜 야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게다.

MZ세대 노조인 ‘새로고침 노동자협의회’는 개편안에 반대하며 “연장근로 관리 단위 확대는 노동자 근로조건을 개선해 온 국제사회 노력과 역사적 발전 과정에 역행한다”고 지적했다. 법정근로시간이 1주 40시간인데 연장근로 허용치인 12시간까지 합친 52시간보다 더 근무시간을 늘리는 것은 수용할 수 없다고 했다. 보사연이 지난 19일 발표한 자료를 보면 취업자가 희망하는 주간 근로시간은 36.7시간이다. 연령대가 낮을수록 희망 근로시간이 더 적었는데, 이는 장시간 노동에 의존하는 생산 시스템이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

노동은 신성하고 자아실현의 수단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건 일을 하지 않고도 생계 걱정이 없는 이들에게나 해당되는 얘기다. 대다수 노동자들은 적정시간 일한 후 퇴근해 가족, 친구와 시간을 보내거나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저녁이 있는 삶’이 필요하다. 시간외 수당이 줄면 ‘저녁밥 없는 삶’이 된다는 주장이 있지만 기본임금을 낮게 책정하고 연장근로로 노동자를 떠미는 시스템을 언제까지 붙들고 있을 건가. 비효율성은 개선하되 근로시간을 줄이면서 생산성은 높이는 방식의 노동개혁을 고민해야 한다. 선진국들이 거쳐온 길인데 우리는 왜 그 보편적인 방식을 외면하려고 하나.

라동철 논설위원 rdch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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