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원응두 (12) 거듭되는 사업 실패로 자금 돌지 않자 사채까지 빌려 써

송 집사 권유로 고무신 장사 시작했다
재미 붙여 교회사택 고쳐서 가게 독립
이웃들 딱한 사정 들어주며 외상 주다…

원응두 원로장로가 고무신 장사를 하던 당시 중문 마을 모습.

정말로 알 수 없는 것이 장사였다. 6·25전쟁 때 월남한 송경호 집사라는 분이 있었다. 그는 여러 가지 옷감을 파는 가게인 포목점(布木店)을 운영했다. 부산에서 물건을 사 와 제주에서 팔았다. 어느 날 송 집사가 자신의 가게 한쪽에 고무신을 팔아보라고 권유했다. 고무신 운반 값으로 한 켤레당 1원씩을 공제하고 수익금을 반반씩 나누자는 조건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고무신을 파는 일을 시작했다.

무자본으로 가게까지 얻게 된다는 것에 감사했다. 다행히 초기에는 고무신 장사가 잘됐다. 그 당시 사람들은 거의 다 고무신을 신었다. 가게에 영업에 집중해 열심히 하니까 일하는 재미도 있었다.

그때 송 집사가 이제는 독립해서 나 혼자 장사를 해보라고 권했다. 귀가 솔깃했다. 나는 교회 사택을 고무신 가게로 꾸몄다. 처음에는 부산에서 고무신을 떼다 팔다가, 제주읍 동문시장에서 사서 팔았다. 가게 손님 모두 이웃사촌이었다. 현금이 없을 때라 대부분 외상 거래였다. 가을에 추수해서 갚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답답했지만 하는 수 없었다. 손님들의 사정을 듣고 마음이 약해 딱한 마음에 외상으로 물건을 주었다. 돈이 생기면 갚겠다는 약속을 하는데 좀처럼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런데 수금은 애초 약속대로 되지 않았다. 그냥 고무신을 가져간 사람 중에는 얘기도 없이 이사 가는 사람이 생기고 병들어 죽는 이들도 있었다. 이러다 보니 외상이 쌓였고 자금이 잘 돌지 않아 고무신을 떼어 오기가 어렵게 됐다.

하는 수 없이 비상수단을 썼다. 물건을 사기 위해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리기 시작했다. 그래야 장사를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고리대금업자의 이자 이율은 4%에서 10%에 달했다. 그리고 더 힘들었던 것은 각 처에 장돌뱅이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골치가 아팠다. 그 사람들이 질 낮은 싸구려 고무신을 가지고 와서 깡이라는 이름으로 헐값으로 고무신을 파는 바람에 우리 가게의 고무신은 잘 팔리지 않았다. 어떤 날에는 한두 켤레 파는 날이 있는가 하면 어떤 날은 한 켤레도 팔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결국 빛 더미에 앉게 되고 말았다. 그래서 궁리 끝에 부채를 청산하기 위해 3801㎡(1150평) 되는 밭을 팔아 빚을 갚았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기장 교단 측이 가져갔던 예배당 부지를 오공화 장로님이 넘겨받아 무임으로 나에게 땅을 빌려줬다. 나는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다시 그 땅에 66㎡(20평) 규모의 상가를 지었다. 다시 한번 도전을 했다. 이번에는 고무신만이 아니었다. 고무신으로는 수입이 너무 적었다. 고무신과 함께 다른 상품을 진열해 잡화 가게를 겸하기 시작했다.

실패한 경험이 있어 열심히 장사에 매달렸다. 욕심이 넘쳤다. 현재하고 있는 장사들이 마음의 양에 차지 않아 물건 종류도 대폭 늘렸다. 여기에 또 식료품까지 함께 팔았다. 장사는 생각만큼 되지 않았다. 계속해서 실패를 거듭하면서 실망감에 빠져들었다. 많은 고민을 했다. 그렇지만 당장 접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리=윤중식 종교기획위원 yunjs@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민일보 문서선교 후원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