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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 깨진 CS의 몰락… 비밀·중립국 스위스가 흔들린다

은행 ‘고객 비밀 보장 시스템’ 해체
美 금융위기때 “거래정보 내놔야”
은행들 예금고 급감… 고위험 투자
CS 불안한 고객들 뱅크런 손 못써

167년 전통을 가진 스위스 3대 은행 크레디트스위스(CS)가 지난 21일(현지시간) 스위스 금융 당국의 강제 중재로 라이벌 은행 UBS에 인수됐다.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으로 파산한 지 3일 만이었다. 사진은 지난해 11월 스위스 수도 베른에 있는 CS 지점에 스위스 국기가 내걸린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유럽 알프스산맥을 낀 조그마한 나라 스위스는 중세시대 때부터 영세중립국이다. 서쪽으론 독일과 프랑스, 남쪽으론 이탈리아, 동쪽으론 동유럽과 러시아를 마주한 지정학적 위치상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나치가 횡행하던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중립국이란 타이틀로 전쟁의 참상을 당하지 않았다.

또 하나 스위스를 대표하는 것은 은행 시스템이다. 한번 돈을 맡기면 고객의 비밀을 철저히 보장해주는 ‘비밀주의’로 무장한 은행들은 스위스 국민 전체를 먹여 살릴 만큼 강력했다. 2022년 기준 스위스 은행들의 전체 예금고는 스위스 국내총생산(GDP)의 5배가 넘을 정도다. 중립주의와 비밀주의는 스위스의 생존법이나 다름이 없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 같은 스위스의 명성이 최근 추락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167년 전통의 스위스 3대 은행 중 하나인 크레디트스위스(Credit Swiss·CS) 파산 사태와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이다.

CS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직후 급작스러운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 현상이 발생하면서 삽시간에 부도 위기에 직면했고, 스위스 정부의 강제 개입으로 단 3일 만에 라이벌 은행 UBS에 헐값 인수됐다.

신문은 “이번 사태는 100년 이상 ‘전 세계 부자들의 안전 금고’로 여겨졌던 스위스 은행들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부각시켰다”면서 “CS 파산 이전부터 스위스 은행 시스템에는 심각한 이상 신호가 발생했다”고 전했다.

이상 신호란 비밀주의의 해체였다. 미국 정부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쳤던 2008년 “미국인의 예금 거래 정보를 반드시 우리 당국에 통보해야 한다”는 내용의 법을 만들어 스위스 정부에 통보했다. 미국에서 자금을 빼내 스위스 은행의 비밀금고에 넣는 행위를 근절해야 미증유의 금융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스위스 은행들은 더 이상 비밀주의를 유지할 수 없게 됐다. 아무리 ‘더러운 돈’이라도 절대 고객 정보와 자금 규모를 발설하지 않는다는 명성에 금이 간 것이다.

이때부터 스위스 은행들의 예금고는 급감했고, 줄어든 예금고를 보충하기 위해 ‘수익은 크지만 더 위험도가 높은’ 투자상품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마크 피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전 국장은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스위스 은행들의 고위험 상품 투자 러시 자체가 지극히 ‘비(非) 스위스적’인 행위”라고 언급했다.

한때 스위스 전체 GDP만큼이나 풍성한 예금고를 자랑하던 CS도 이런 방법으로 수익을 얻으려다 파산 사태에 휩싸였다는 게 금융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미국 SVB 도산으로 불안해진 CS의 고객들이 예금을 마구 인출하자 손 쓸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WSJ는 “스위스가 은행 시스템 문제뿐 아니라 국가 정체성마저 상실할 위기에 빠져들고 있다”고 전했다. 발발한 지 1년이 지나가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영세 중립국의 위상이 송두리째 뽑힐 상황이란 진단이다.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는 스위스가 자국산 무기와 총탄·포탄의 우크라이나 수출을 반대하자 “중립국이라는 지위가 결코 특권이 돼선 안 된다”며 연일 스위스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반대로 러시아는 “중립국이면서 서방 편에만 선다”며 ‘비우호국가’ 리스트에 스위스를 등재했다. 거기다 유럽연합(EU)은 스위스가 역내 자유무역협정에 가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양한 경제 제재까지 가할 태세다.

신문은 “냉전 시절 국제 분쟁을 중재할 정도로 국제사회로부터 존중받던 스위스의 중립주의는 이제 유물이 될 지경”이라며 “스위스는 지금 국가 정체성을 형성했던 오랜 전통을 유지할지, 아니면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할지 딜레마에 빠졌다”고 전했다.

신창호 선임기자 proco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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