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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세 국내 최고 리베로 “우승, 또 도전해야죠”

한국 프로배구 최초 정규리그 출장 600경기 넘긴 여오현

현대캐피탈 리베로 여오현이 지난 15일 충남 천안 캐슬오브스카이워커스에서 리시브 연습을 하고 있다. 1978년생, 올해 45세로 프로배구 최고령 선수인 여오현은 V리그에서 무려 603경기를 뛰었다. 포스트시즌 75경기와 컵대회 55경기를 더하면 700경기를 훌쩍 넘는다. 천안=이한형 기자

‘603’.

배구선수 리베로 여오현(45·현대캐피탈)의 통산 V리그 정규리그 출장 경기 수다. 이 숫자를 좀 더 체감하기 위해선 V리그 원년 2005년부터 2022-2023시즌까지 19시즌간 남자부 한 팀이 치를 수 있는 모든 경기 수를 더한 637경기와 비교하면 좋다. 출장률은 94.6%. 결장이 ‘비교적’ 잦았던 최근 3시즌을 빼면 98.1%(529경기 중 519경기)까지 오른다. 포스트시즌 76경기와 컵대회 55경기를 더하면 700경기를 훌쩍 넘는다.

지난 15일 충남 천안 캐슬오브스카이워커스에서 만난 여오현은 “참 오래하긴 했다”고 운을 뗐다. 오래했다는 말은 그가 팀에 필요한 선수였다는 말이기도 하다. 팀은 잘하는 선수가 필요하다.

V리그 수비 부문 역대통산 기록은 대부분 여오현의 것이다. 25일 현재 통산 리시브 1위(7921개) 디그 1위(5201개) 수비성공 1위(1만3122개)다. 정규리그 승리 수도 414회(승률 68.66%)로 역대 1위다. V리그 우승은 삼성화재 시절 7회, 현대캐피탈 시절 2회다. 이밖에도 기록과 수상 이력은 즐비하다.

리베로 여오현

“처음은 리베로 제도가 생긴 거요. 그 후에 삼성화재에 입단해서 국가대표 선수가 됐고, (2002 부산)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서 군 면제를 받으면서 팀에서도 승승장구했어요. (2013년 7월) 현대캐피탈로 이적한 뒤에는 최태웅 감독님을 만나 ‘45세 프로젝트’까지 했고요. 제가 생각해도 시기도, 운도 잘 맞았던 선수 같아요. 좋은 지도자도 잘 만났어요.”

배구 인생의 이정표를 묻자 긴 선수 생활만큼 여러 지점이 나열됐다. 특히 리베로 제도에 대해선 “안 생겼다면 대학 졸업해서 선수 생활도 끝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신장은 175㎝. 배구선수로선 단신이다. 초등학교에 배구부가 생겨 배구에 발을 들였는데 중고교에 진학해도 키가 비약적으로 크지 않았다. 선수로서 미래가 어둡다고 판단한 지도자는 여오현에게 역도 레슬링 유도 등 종목 전환을 제안했고 실제 테스트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배구를 계속했다. “그냥 배구가 하고 싶더라고요.”

1998년 그에게 기회가 왔다. 국제배구연맹(FIVB)가 ‘수비 전문’ 리베로 포지션을 공식 도입한다. 공격·블로킹·서브를 할 수 없기 때문에 키가 크지 않아도 됐다. 당시 홍익대 아웃사이드히터(OH)였던 여오현은 몇 개월 후 리베로로 전향했다. 그는 자신있었다. “지금은 수비형 OH라 하잖아요. 대학 때 OH로 공격도 했지만, 리시브 절반 정도는 차지해서 할 정도로 자신감은 있었어요.”

점수를 내야 승리하는 스포츠에서 스포트라이트는 주로 공격수를 비춘다. 하지만 여오현은 스포트라이트를 자신에게로 가져올 수 있는 수비수였다. 상대가 강할수록, 큰 무대일수록 진가가 드러났다.

2001년 태극마크를 단 여오현은 2012년까지 주전 리베로로 12년 활약했다. 은퇴하는 해 월드리그(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의 전신)에서는 리시브 1위(성공률 73.24%), 디그 3위(세트당 2.53개)를 기록했다. 세계적 명장인 베르나르두 헤젠지 감독은 과거 여오현을 두고 “유럽 빅리그에서 바로 뛰어도 될 선수”라고 극찬했다. 2004년 실제 해외리그에서 이적 제안이 왔지만 아쉽게 성사되지 못했다.

시몬(2014-2015, 2015-2016시즌), 그로저(2015-2016시즌) 등 세계적 선수들이 자유계약으로 V리그에 왔을 때도 그의 가치는 빛났다. 2014-2015, 2015-2016시즌 2연속 베스트7 리베로 부문에 선정됐다. “세계적 용병들이 V리그에서 뛸 때 엄청나게 좋은 서브가 잘 들어왔어요. 강서브를 받아내야 했기 때문에 리베로의 가치가 더 높아진 거 같아요. 저도 더 잘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꾸준함이 만든 600경기
천안=이한형 기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좌우명을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뜻이 좋더라고요.” 1978년생, 올해 45세로 프로배구 최고령 선수이면서도 한참 어린 후배들과 실력으로 맞붙고 있는 그에게 잘 어울리는 말이다.

운동선수로서의 마음가짐에서 큰 부분은 이기고 싶다는 ‘승부욕’이 차지한다. 그는 간단한 내기도, 미니게임도 지기 싫어한다. “후배들이 저를 무서워할 거란 생각도 해요. 경기 중에 지기 싫어서, 잘하자는 의도로 강하게 말하곤 했는데 그게 후배들에겐 압박이 될 수 있겠단 생각을 뒤늦게 해요. 가끔은 후배들이 먼저 ‘너무 흥분하지 말라’고 해요. 제가 자중해야 하는데 경기 중엔 그게 잘 안 돼요.(웃음)”

그의 모바일메신저 프로필 상태메시지에는 ‘일체유심조’와 함께 ‘자승자강(自勝者强)’이라는 말도 있다. ‘자신을 이기는 것을 강함이라 한다’는 뜻이다. 지난 2월 21일 V리그 역사상 최초로 달성한 정규리그 600경기 출전 기록은 그가 과거의 자신을 끊임없이 극복해온 결과다. 소속팀이 리빌딩에 성공해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여서 더욱 뜻깊다. 현대캐피탈은 지난 두 시즌 각각 6위와 7위에 머물렀지만, 올시즌 정규리그 2위에 오르며 명가의 자존심을 되찾는 중이다.

“3년 전쯤부터 리빌딩 하면서 많이 힘들었죠. 저도 뭔가 허해지고…. 그 당시엔 ‘아 이젠 나도 배구를 그만둬야 하나? 힘든가?’ 그런 위기감이 있었어요. 하지만 올 시즌 어린 선수들과 함께 한 단계 올라선 것 같아요. 후배들의 발전 가능성도 크기 때문에 더 강팀이 될 거라 생각해요.”

지는 걸 싫어한다고 했지만, 그는 후배들이 자신을 뛰어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제가 얼마나 더 많은 경기를 뛰냐는 의미가 없다 생각해요. 저를 뛰어넘을 후배들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그 아래 선수들도 더 높은 목표를 세울 거잖아요.”

그 첫 후보로 같은 팀 리베로 박경민을 꼽았다. 자신보다 21살 어린 박경민은 2020-2021시즌 신인드래프트 1라운드 4순위로 프로에 진출해 이듬해 리그 베스트7 리베로에 선정됐다. “(후계자는) 박경민 선수죠. 다른 선수들도 잘하지만, 경민이는 발전가능성이 커요. 앞으로 대한민국 대표 리베로로 발전해갈 거예요. 저를 뛰어넘을 선수기 때문에 라이벌의식은 있을 수 없고, 경민이가 잘해야 제가 잘 쉬면서 힘들 때 도와줄 수 있겠죠(웃음).”

올 시즌은 ‘45세 프로젝트’가 완수되는 시즌이다. 여오현이 45세까지 선수로 뛰게 하겠다는 최태웅 감독의 프로젝트다. 선수의 철저한 자기관리와 감독의 믿음·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여오현은 최 감독을 향한 마음도 드러냈다.

“정말 대단한 분이세요. 선수 시절엔 저보다 악바리였어요. 혼자 야간훈련을 하는데 숫자 세면서 토스 1만개를 해요. 말이 1만개지 100개만 해도 어깨가 빠질 것 같을 거예요. 지도자로서도 항상 선수들보다 열정적이세요. 밤새 비디오 분석하고, 좋은 배구 시스템과 선수들 장단점을 찾아서 알려주세요. 그러면서도 강압적이지 않고 선수들이 알아서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려고 노력해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감독님을 잘 만나 행복하다고 생각할 거예요.”

45세 프로젝트를 연장할지, 은퇴 후 본격적인 지도자 생활을 시작할지는 결정되지 않았다. 우선은 ‘봄배구’를 잘 마무리해야 한다. “(우승) 아홉수에 갇혀있는데 이번에 또 도전해야죠. 팀이 웃으면서 시즌을 끝낼 수 있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거예요.”

‘선수 생활 중 어떤 말을 들었을 때 가장 좋았냐’는 마지막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냥 꾸준한 선수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제일 좋았어요. 꾸준하게 경기장에 있었고, 코트 안에서 소리쳤던 선수. 팬들이 그 모습을 보고 ‘아 저 선수 꾸준하게, 성실하게 잘했다’ 그런 말을 해주실 때 자부심을 느껴요.”

천안=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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