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돈키호테’ 주인공이 왜 돈키호테가 아닐까요”

국립발레단 ‘KNB 무브먼트’ 송정빈 인터뷰

이달 전막발레 ‘돈키호테’의 재안무를 선보이는 송정빈 안무가가 지난달 16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국립발레단 연습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권현구 기자

국립발레단은 2015년 차세대 안무가 육성을 위해 ‘KNB 무브먼트’ 시리즈를 시작했다. 2014년 취임한 강수진 단장이 친정인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신인 안무가 육성 프로그램을 벤치마킹 한 것이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은 이 프로그램을 통해 이리 킬리안, 존 노이마이어, 윌리엄 포사이스 등 세계적 거장들을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 발레는 그동안 교육을 통해 기량 있는 무용수들을 빠르게 배출했다. 한국 무용수들이 해외 콩쿠르를 휩쓸고 메이저 발레단 주역으로 활동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안무가의 존재감은 미비하기 짝이 없다. 발레 안무가의 경우 장르의 특수성 때문에 프로 발레단에서 긴 시간에 걸쳐 성장할 뿐만 아니라 작품을 업그레이드해 레퍼토리로 만들 수 있어서다.

국립발레단의 KNB 무브먼트는 안무가 기근에 시달리는 한국 발레에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안무에 재능있는 국립발레단 단원들이 발굴됐기 때문이다. 대표적 인물이 송정빈(37)이다. 현재 솔리스트인 송정빈은 2016년 KNB 무브먼트에서 ‘흉터’로 안무 데뷔를 한 이후 ‘잔향’ ‘포모나와 베르툼누스’ ‘아마데우스 콘체르토’ 등을 꾸준히 선보였다. 그리고 2020년 재안무한 전막발레 ‘해적’이 국립발레단 정기 공연으로 3년간 무대에 오르며 안무가 입지를 다졌다. 그가 오는 4월 12~16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또 다른 전막발레 ‘돈키호테’의 재안무를 선보인다.

KNB 무브먼트 참여하며 안무 재능 드러내
송정빈이 2020년 국립발레단에서 재안무한 전막발레 ‘해적’의 공연 장면. 손자일씨 제공

“‘해적’에 이어 ‘돈키호테’를 재안무할 때 염두에 둔 것은 클래식 안무의 본질을 지키면서 나만의 새로움을 더하자는 거였어요. 고전을 인정하되 시대적인 변화 등을 반영한 작업이 국립발레단만의 스타일이자 경쟁력이라고 생각해요.”

송정빈이 처음 재안무에 도전한 전막발레 ‘해적’은 클래식 발레의 아버지로 불리는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1818~1910)가 안무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작품이다. 콘라드 선장이 이끄는 정의로운 해적단이 파샤(오스만 제국 총독)의 하렘에 노예로 팔려간 그리스 소녀 메도라와 귈나라를 구하는 내용이다. 여기에 콘라드의 충직한 부하 알리 그리고 콘라드를 배신하는 2인자 비르반토의 이야기가 교차한다.

그런데 요즘 시대에 소녀들이 하렘에 노예로 팔려가는 내용이 공감을 얻기 어려운 만큼 송정빈은 귈나라를 여사제로 바꾸고 메도라를 사랑스러운 소녀로 바꿨다. 이에 따라 원작 속 노예들의 춤 대신에 ‘메도라의 친구들’이란 이름으로 바뀌는 등 송정빈은 빠르고 간결한 전개 속에서 캐릭터 등에 변화를 꾀하되 기존의 중요한 춤을 남겼다. 국립발레단의 ‘해적’은 오는 5월 스위스 로잔과 독일 비스바덴에서 각각 수교 60주년과 130주년 일환으로 공연될 예정이다.

송정빈은 “강수진 단장님이 2018년 ‘포모나와 베르툼누스’를 보고 ‘해적’ 재안무를 권하셨다. 당시 다른 단원들이 모던 발레를 준비한 것과 달리 내가 클래식 발레로 선보인 것을 좋게 보셨던 것 같다”며 “재안무에 도전장을 냈지만, 준비하는 동안 두려움이 정말 컸다. 그래서 구할 수 있는 ‘해적’ 영상을 모두 찾아보는 등 열심히 공부했다”고 되돌아봤다. 이어 “유럽에서 내가 안무한 ‘해적’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고 덧붙였다.

송정빈이 국립발레단의 ‘KNB 무브먼트’ 시리즈를 통해 선보인 ‘흉터’(위)와 ‘포모나와 베르툼누스’. 국립발레단 제공

돈키호테의 사랑과 모험에 초점 맞춰 재안무

이번에 송정빈의 재안무로 새롭게 선보일 ‘돈키호테’는 젊은 남녀 키트리와 바질의 사랑 이야기가 중심인 원작에 비해 기사 돈키호테의 사랑과 모험에 포커스를 맞췄다. 프티파가 안무한 원작에서 돈키호테는 늙은 기사인 만큼 무대 위에서 춤추지 않고 마임만 한다. 하지만 국립발레단의 ‘돈키호테’에서는 1명의 무용수가 늙은 돈키호테와 젊은 돈키호테를 동시에 연기하며 역동적인 춤을 소화한다. 이와 함께 돈키호테가 키트리와 바질을 쫓아 숲속에 갔다가 꿈꾸는 장면, 즉 ‘드림씬(dream scene)’이 대폭 수정됐다. 원작에선 돈키호테가 키트리를 자신의 환상 속 여인 둘시네아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1명의 무용수가 키트리와 꿈 속 둘시네아를 모두 맡는다. 그러나 송정빈은 드림씬에서 원작에 없던 둘시네아를 추가한 뒤 젊은 돈키호테와 춤추도록 했다. 또 드림씬의 변화에 더불어 집시들은 유랑 극단으로 바뀌어 극중극을 보여주는 등 극의 재미를 더했다.

“작품 제목이 ‘돈키호테’인데 왜 키트리와 바질이 주인공인지 늘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재안무하면서 돈키호테를 보다 입체적인 캐릭터로 바꿨습니다. 또 유랑 극단의 연극은 돈키호테의 풍차 공격을 좀 더 개연성 있게 만드는 장치로 활용했습니다. 그동안 프티파 버전에 익숙한 관객에겐 제가 재안무한 ‘돈키호테’가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재안무에는 안무가만의 해석이 필수적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새롭게 안무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요.”

확신에 찬 안무철학을 보면 송정빈은 오래전부터 안무가를 꿈꾼 듯하다. 하지만 러시아 페름 발레학교와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하고 2008년 국립발레단에 입단한 그는 KNB 무브먼트에 참여하면서 안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류시화 시인의 시를 모티브로 만든 첫 작품 ‘흉터’가 관객의 호평은 물론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덴마크 현대미술가 올라퍼 엘리아슨의 전시와 연계공연으로 선보이는 영예를 얻었다.

“앞으로의 꿈은 창작 전막발레 안무”

“솔직히 발레를 시작한 이후 안무가를 꿈꿨던 적은 없습니다. 그저 제 얘기를 춤으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KNB 무브먼트에 참여했는데요. 매년 꾸준히 참여하며 점차 안무에 재미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전막발레 ‘해적’과 ‘돈키호테’를 재안무 하면서 이제는 제게서 안무를 떼어놓을 수 없게 됐습니다. 무용수로 무대에 오를 땐 최선을 다해 춤춘 뒤 관객에게 박수받는 기쁨이 컸어요. 반면 안무가로서는 국립발레단과 우리 단원들이 더 빛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큽니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안무가는 국립발레단과도 여러 차례 작업한 러시아의 거장 유리 그리고로비치. 포인트 슈즈를 기본으로 하는 클래식 발레만의 매력을 유지하면서 춤과 음악의 조화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요즘 세계적으로 발레단과 현대무용 안무가의 작업이 늘면서 포인트 슈즈를 벗는 사례가 많지만, 그는 발레에 뿌리를 둔 만큼 자신의 작품에선 포인트 슈즈를 꼭 신기고 싶단다. 앞으로의 꿈은 창작 전막발레를 안무하는 것이다. 참고로 KNB 무브먼트를 통해 안무가로 발굴된 또 다른 단원 강효형은 ‘수월경화’ ‘호이랑’ 등 창작 전막발레를 안무한 바 있다.

그는 “재안무는 고전의 본질과 저만의 해석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만의 안무로 처음부터 만드는 창작 전막발레를 선보이고 싶다”면서 “가능하면 음악도 새롭게 작곡하게 하고 싶다”고 피력했다. 이어 “안무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지다 보니 무용수로서 은퇴 시기가 빨라지는 것 아닌지 걱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좋은 안무가가 되기 위해 계속 배우고 고민하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고 덧붙였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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