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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힌 비운의 화가, 33년 만에 그를 불러낸 두 컬렉터

성곡미술관 ‘원계홍 탄생 100주년 기념전’ 열리기까지

원계홍은 독학파 특유의 분방한 기법으로 개발연대 시대의 서울 주택가 풍경을 캔버스에 담았다. 그를 사랑한 두 컬렉터의 열정 덕분에 잊힌 작가 원계홍의 개인전이 33년 만에 서울 성곡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위 사진은 ‘장충동 1가 뒷골목’(1980년, 캔버스에 유채, 65×80.6㎝). 성곡미술관 제공

2007년의 어느 날, 컬렉터 윤영주(우드앤브릭 회장·크라운제과 창업주 4남)는 습관처럼 네이버 검색창에서 ‘원계홍’ 세 글자를 쳤다. 이날따라 작고 화가 원계홍(1923∼1980·아래 사진)에 관해 쓴 블로그 글이 떴다. 반가운 마음에 댓글을 달았다. “작가님을 존경해 작품을 오래 소장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작가의 딸이 그걸 보고 연락을 해왔고, 또 다른 ‘원계홍 마니아’ 김태섭 전 장신대 학장과의 만남도 주선했다.


그날의 댓글이 불씨가 돼 서울 종로구 성곡미술관에서 ‘그 너머_ 원계홍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한다. 마지막 유작전 후 33년 만이다. 잊힌 서양화가 원계홍을 한국 미술계에 다시 불러낸 것은 그를 향한 두 컬렉터의 뜨거운 마음이다. 원계홍이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독학파라는 걸 알면 두 컬렉터의 열정이 더 놀랍게 다가온다.

원계홍은 일본 도쿄 주오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미술이 좋아 경제학 공부는 팽개친 채 파리에서 유학한 이노쿠마 겐이치로가 운영하는 사설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배웠다. 원계홍은 1944년 귀국했고 1948년 이대 영문과에 재학 중이던 민현식과 결혼했다. 원계홍 집안은 영등포에서 철공업소를 운영하던 부자 집이었고, 처가 역시 ‘전남에서 맨 처음 자가용을 굴리던’ 호남의 갑부 집안이었다. 결혼 후 원계홍은 파리 유학을 꿈꾼 적도 있었지만 부친의 반대로 좌절됐다. 그래서 집안 사업을 도우면서 1950년대 초반부터 자신의 그림 세계를 추구했다.

그렇게 그린 그림들이 입소문을 타면서 원계홍은 1978년, 1979년 두 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그는 미술애호가 김순배를 통해 훗날 국립현대미술관장이 된 미술평론가 이경성과도 어울렸다. 일본에서 정규 미술 교육을 받은 인기 서양화가 박고석과도 친했다. 그가 두 번의 개인전을 건축가 김수근이 운영하던 공간화랑에서 한 것은 김수근이 박고석의 처남이었던 인연이 작용했다.

이처럼 1970년대 후반 들어 개인전을 열며 미술계에 존재감을 드러내던 그에게 죽음은 어이없이 찾아왔다. 그는 1980년 딸 가족의 성화에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고, 현지 도착 20일 만에 심장마비로 불과 57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타계한 지 4년 뒤인 1984년 인사동 공창화랑에서 유작전이 열렸다. 컬렉터 윤영주가 원계홍의 존재를 안 건 그 전시에서다. 조각 전문 컬렉터로 잘 알려진 크라운해태그룹 윤영달 회장의 동생인 윤영주는 서예를 취미로 하다가 1970년대 말부터 전시 구경을 다녔다. 같이 전시를 보러 다니던 한의사인 선배 염용환이 먼저 전시를 보고 와 연락이 왔다. “이건 단순한 작품이 아니야.”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윤영주 회장은 “그림이 너무 좋아 전시가 끝날 때까지 매일 보러 갔다”고 전했다. 당시 경제적 여력이 없어 18점 정도만을 사면서 미망인에게 “작품을 팔지 말아달라, 흩어지면 안 된다. 언제가 미술관을 만들고 싶다”고 간곡히 부탁했다.

전시를 성사시킨 두 컬렉터 윤영주(왼쪽)·김태섭씨. 성곡미술관 제공

그가 사지 못한 나머지 그림들은 또 다른 컬렉터 김태섭 학장 품에 안겼다. 그 사연도 기가 막히다. 1989년, 원계홍의 부인은 부암동 자택을 처분하려고 내놓았다. 그때 복덕방 사장과 함께 그 집을 보러온 김태섭씨가 원계홍의 그림에 반해 집과 그림을 통째 산 것이다. 그가 산 200점과 염용환이 산 6점, 윤영주가 소장한 18점 중에서 엄선한 100점이 이번 전시에 나왔다. 지난해 김 학장이 원계홍 탄생 100주년에 맞춰 기념전을 열자고 먼저 제안했고, 윤영주 회장의 중학교 동창인 최효준 전 서울시립미술관장이 주선해 성곡미술관에서 전시를 기획하게 됐다.

‘홍은동 유진상가 뒷골목’(1979년, 캔버스에 유채, 46×53㎝). 성곡미술관 제공

도대체 어떤 그림이길래 컬렉터들이 운명처럼 사랑에 빠져 100주년 기념전까지 열어준 걸까. 전시장에 다 나온 그림들은 다 10호, 20호 정도의 크기였다. 100호 넘는 대형 캔버스가 넘쳐나는 시대라 전시장은 과거로 돌아간 기분을 준다. 그런 작은 캔버스에 원계홍은 서울의 주택가 풍경을 그려 넣었다. 작품마다 부암동, 장충동, 회현동, 성북동 등 1970년대 서울의 동네 이름이 적혀있다. 그는 그 골목에 이젤을 펼쳐놓고 즉석에서 유화 물감을 묻혀 붓질했다. 인상주의 대표 작가 클로드 모네처럼 말이다. 모네의 그림처럼 원계홍의 캔버스도 그리다 만 듯, 쓱쓱 무심하게 그은 붓질의 흔적이 역력하다. 전봇대 표현을 세로로 내리 그른 붓질 한번으로 끝내는 식이다. 그 현장성이 마치 1970년대 서울의 주택가에 타임머신을 타고 들어선 기분을 준다. 하늘과 시멘트 길바닥이 같은 회색톤이어서 개발 시대 매연으로 자욱했을 서울의 하늘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우중충한 색, 무심한 붓질 덕에 시대의 우울과 도시의 소외가 배어나온다. 사람 없는 거리 풍경으로 한 시대의 정서를 포착한다는 점에서 20세기 초반 미국 도시의 일상을 그린 에드워드 호퍼가 연상된다.

‘골목’(1979년, 캔버스에 유채, 50×60.7㎝). 성곡미술관 제공

그런 원계홍의 진가를 당대 최고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알아봤다. 국립현대미술관장이 된 이경성은 1989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원계홍 회고전’을 열었다. 국립기관에서의 전시는 미술가들의 최고 로망이다. 그런 기회를 아마추어 작가에게 제공했다는 것은 이경성의 용감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아카데미즘에 물들지 않은 원계홍의 혁신성에 대한 상찬이기도 하다. 원계홍의 그림에서는 투시도법을 무시한 채 폴 세잔의 그림처럼 다시점이 적용된 걸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집과 담 등이 ‘얼짱 각도’로 표현된 게 그런 예이다. 5월 21일까지.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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