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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청전은 부동의 1위… 삼성가에 한국화 여럿 납품”

동산방화랑 박주환 아들 박우홍이 들려주는 그시절 이야기

1960년대 표구사 겸 화랑으로 출발한 동산방 설립자 고 박주환씨가 작업실에서 표구작업을 하고 있다. 당시 상문당, 상신당, 박당 등 몇몇 표구사가 있었지만 박주환이 차린 동산방이 최고 인기였다고 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1961년 지금 영풍문고 앞 전봉준 동상 자리에는 한옥이 있었다. 그 한옥에 ‘동산방’이라는 표구사가 들어섰다. 종로가 확장되기 전의 일이다. 표구사 주인은 32세의 박주환(1929∼2020). 그는 일제 강점 말기부터 사촌형이 경영하던 표구사에서 일을 배우다 독립해서 가게를 차렸다. 일본인이 물러나고 인사동 표구사들이 한국식 표구 방식을 찾아가던 시기였다. 상문당, 상신당, 박당 등 몇몇 표구사가 있었지만 박주환이 차린 동산방이 최고 인기였다. 나중에 지금 자리로 이전해서는 화랑일을 병행하며 전시를 통해 작가를 육성하는 한편, 컬렉션을 했다. 아들인 박우홍 현 대표는 부친이 타계한 후 유지를 따라 2021∼2022년 한국화 컬렉션 209점을 기증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동녘에서 거닐다: 동산 박주환 컬렉션 특별전’이 최근 개막한 것을 계기로 박 대표를 동산방 화랑에서 만나 그때 그 시절 이야기를 들어봤다.

-왜 동산방 표구가 인기 있었나.

“전통 한국화는 병풍이나 족자 두루마리 형식의 표구를 하지만 일본식은 액자를 했다. 하지만 두세 종류로 스타일이 한정됐다. 70년대 들어 반양옥과 아파트가 등장하며 가옥 구조가 바뀌자 과거의 액자 스타일이 어울리지 않았다. 부친이 새로운 액자 스타일을 개발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작가의 작품 특성에 맞는 스타일을 개발했다. 당시 잘 나가던 작가의 호를 따 산정식(서세옥), 지목식(이영찬), 남정식(박노수), 오당식(안동숙), 동산식(천경자) 등 10여개가 있었다.

-어떻게 개발이 가능했나. 대단하다.

“50년대까지만 해도 표구사는 비단과 종이만 다룰 줄 아는게 아니라 목공까지 해야 표구 기술자가 될 수 있었다. 표구사는 대패질도 잘해야 했던 것이다. 동산방은 표구사 중 유일하게 목공소를 직영했기에 개발이 가능했다. 나무의 액자 형태를 달리하려면 대패의 칼날을 그 형태로 만들어서 깎아야 하는데, 목공 하는 사람은 번거롭다고 이걸 싫어한다. 목공소를 직영하니 그런 변형이 가능했다.”

-천경자는 왜 동산식인가.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걸 쑥스러워해 천경자 선생 작품의 표구 방식은 동산식으로 불렀다. 천경자 선생은 표구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다. 표구를 하는 날이면 중부경찰서 근방 수입 실크점에 가서 직접 여러 가지 색의 천을 끊어온다. 그러곤 아버지와 어떤 색깔을 할지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로 논의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화랑은 74년도에 개관했지만 그 전에도 전시를 한 것으로 한다.

“맞다. 66년도에 견지동 이 자리로 이사 왔다. 당시는 한옥집이었는데, 작업장은 뒤에 두고 앞쪽에는 전시장을 뒀다. 그래서 동산방하면 표구도 하고 화랑도 하는 곳으로 인식이 됐다.”

-이상범 변관식 김은호 노수현 박승무 허백련 등 소위 6대가가 인기였나.

“70년대까지만 해도 6대가는 인기가 없었다. 오히려 조선시대 회화나 소림 조석진, 심전 안중식, 오원 장승업, 석파 이하응 등 구한말 근대작가의 작품이 더 잘 팔렸다. 서양화는 말할 것도 없고. 그러니 70년 문을 연 현대화랑이 이중섭 박수근을 발굴해 전시한 것은 대단한 일이다. 이상범 변관식 등은 70년대 중반들어 우뚝 서기 시작했다. 한 일간지에서 6대가 전시회를 한 것이 계기가 돼 조명되기 시작했다.”

-청전 이상범의 인기는 어땠나.

“청전은 부동의 판매 1위였다. 지금의 김환기 같았다.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반 1억원까지 값이 나갔던 작가였다. 70년대 초반 5만원, 10만원 하던 게 그렇게 올랐던 것이다. 지금은 좋은 작품이 7000만원, 8000만원 한다. 오히려 가격이 추락했다.”

-기증한 1920∼2000년까지의 한국화 컬렉션 외에 동산방의 고미술 컬렉션도 유명하다고 들었다.

“표구의 최고는 보수와 복원이다. 70년대 전통 회화 좋은 것은 보수하러 동산방으로 다 왔다. 덕분에 손재형, 이동주 등 안목 좋은 분들의 지도를 받아 표구만 한 게 아니라 안목을 키웠다. 또 리처드 스나이더 전 주한 미국대사 부인이 열성적인 민화 컬렉터였다. 대사 임기 끝나고 나서도 한국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며 민화를 수집했다. 외국인들이 민화를 좋아하는 걸 보면서 수집을 하게 됐다. 당시는 값도 싸고 좋은 것도 많은 시절이었다.”

-삼성가와도 인연이 있었다는데.

“이건희 컬렉션이 고미술로 출발하지 않았나. 이병철 회장이 우리 화랑에서 산 소품 고서화 한 점을 아들 이건희 부부에게 선물로 주었고 그걸 보면서 고미술을 공부하게 됐다고 한다. 이 회장이 고미술을 배우기 위해 제 아버지를 자택으로 초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제 아버지는 12시 통금 시간은 다가오고 이야기는 끝이 안나 애가 탔다고 한다. 국가에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에는 저희 화랑이 납품한 것도 있다. 일월도 호피도 등 궁중 회화, 심산 노수현, 운보 김기창, 청전 이상범 등의 작품이 들어있더라.”

-민중미술 시발점이 된 80년 ‘현실과 발언’ 창립전을 동산방에서 했다는데.

“당초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 창립전이 열렸지만 불온하다는 이유로 개막일에 전시장 전기 스위치가 모두 내려지고 작품이 철거됐다. 전두환 정권 시절 아닌가. 현실과 발언 멤버들이 어느 식사 자리에서 울분에 차서 이야기하는 걸 부친이 옆에서 듣고는 우리 화랑을 쓰라고 제안했다고 한다. 시뻘건 흙이 뒤집어져있고, 칼이 꽂혀 있는 ‘발언이 센’ 그림들이었다. 그래서 전시를 시작하자 ‘화랑 대표가 남산(중앙정보부)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냐’며 많은 분들이 우려했다. 전시 내내 노심초사했지만 무사히 마무리됐다. 그 전시를 계기로 민중미술이 일어났다. 당시 전시를 도운 사람으로 감회가 새롭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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