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시사 > 전체기사

원자재 시장 흑막… 소름 돋는 중개업체

[책과 길] 얼굴 없는 중개자들
하비에르 블라스·잭 파시 지음, 김정혜 옮김
알키, 604쪽, 2만5000원


석유, 금속, 곡물 등 천연자원을 사고파는 회사들이 있다. 자원을 가진 국가에서 물량을 사들여 필요한 곳에 되팔아 돈을 번다. 자원 거래는 소수의 기업이 독점하고 있다. 이들이 바로 ‘원자재 중개업체’다.

2020년 초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전 세계 경제 활동이 위축되면서 국제 유가가 폭락했다. 당시 원자재 중개업체들은 거저 수준으로 석유를 쓸어 담아 유조선에 보관했다. 석유 수요가 다시 회복의 기지개를 켜자 이들은 보관해온 석유를 이용해 누구보다 빠르게 공급했다. 글렌코어라는 회사는 2020년 상반기에만 석유 거래로 13억 달러(약 1조7000억원)의 수익을 냈다.

원자재 중개업체들의 수익은 애플이나 코카콜라와 비슷한 수준이다. 하지만 이 회사들은 오랫동안 베일 속에 가려져 있었다. 금속과 밀에서 세계 최대 거래 규모를 자랑하는 글렌코어, 금속과 석유 거래 부문 세계 2위인 트라피구라, 석유 중개 시장의 선두 주자 비톨, 곡물 중개 시장을 지배하는 카길 등이 이 업계의 대표 회사들인데 일반인들에겐 이름조차 낯설다. 대부분이 개인회사이고 비공개회사이기 때문이다.


‘얼굴 없는 중개자들’은 세계 자원시장을 움직이는 원자재 중개업체를 조명한 최초의 책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출신의 원자재 전문 저널리스트 두 명이 100명이 넘는 관계자 인터뷰를 통해 원자재 중개산업의 역사와 주요 업체들, 핵심 인물들을 드러냈다.

원자재 중개업체들은 국제 정치와 경제의 위기를 이용하며 몸집을 불려왔다. 예컨대, 1990년대 소련 붕괴 당시 이들은 엄청난 돈을 벌었다. 소련은 원유와 금속, 곡물 부문에서 세계 최대 생산국 중 하나였지만 이 자원들을 수출할 수 있는 전문성이나 금융 체계가 부재했다. 원자재 중개 업체들이 그 일을 맡았다. 그들은 러시아의 거대한 천연자원 시장을 외부 세상과 연결시켜 주고, 러시아 지배층에 외화를 안겨줬다.

2000년대 들어서는 중국의 부상이 기회를 제공했다. 중국발 수요 광풍이 불면서 원자재 수요가 급증했다. 원자재 중개업체들은 더 많은 원자재를 구하기 위해 아프리카까지 들어갔다. 그들은 아프리카산 원자재와 중국 공장을 연결했고, 아프리카 부패 관료에게 런던과 스위스 은행 계좌를 만들어줬다.

“그들은 아프리카 원자재를 사들였고 무탄다 같은 광산에 투자했으며, 아프리카 정부가 차관을 조달하는 일까지 도왔다. 자연스레 나라 안팎에서 외면받는 많은 독재자를 떠받치는 버팀목 역할까지 했다.”

원자재 중개업체들의 존재는 국제사회의 제재와 금수 조치에도 불구하고 독재국가나 테러국가들이 생존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사담 후세인 시절 이라크에 대한 석유 금수 조치가 시행되고 있을 때, 원자재 중개업체들은 조세피난처에 세운 회사를 통해 이라크산 석유를 팔아줬다.

“사실 많은 원자재 중개업체는 제재와 금수 조치를 위협이라기보다 기회로 여겼다. 금수 조치 대상 국가는 거래 상대방을 찾기 더욱 어려워지니, 그들과 거래할 방법을 찾은 원자재 중개업체는 유리한 입장에서 더 많은 이익을 챙겼다. 1980년대 아파르트헤이트를 이유로 남아공에 석유 금수 조치가 내려졌을 때 리치와 테우스가 석유 거래로 천문학적인 돈을 쓸어 담은 것만 봐도 그랬다.”

원자재 중개업체들이 성공의 문을 여는 열쇠는 원자재 확보다. 원자재 중개 업체는 막강한 돈을 들고 국제 제재, 국가부채 위기, 독재자의 자금난 같은 문제를 해결해주면서 그 대가로 자원을 확보했다. 불안정한 국가일수록 그들이 얻는 보상은 더 컸다. 그들은 자메이카, 카자흐스탄, 차드, 이라크령 쿠르드 등에서 자신의 금융 권력을 아주 효과적으로 썼다.

그들이 가장 많은 돈을 투입한 곳은 러시아였다. 저자들은 “푸틴이 권력을 유지하는 데 그들의 돈은 아마 국제 비즈니스의 그 누구보다도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러시아가 서방 정책을 거의 정면으로 거스르는 방향으로 움직일 때도 원자재 중개업체는 러시아에 돈을 댔다. 그 돈은 푸틴이 서방 제재의 파고를 무사히 헤쳐 나오도록 도왔다.

책은 전 세계를 무대로 위기를 기회로 삼아 불법과 합법 사이를 오가며 천문학적 수익을 올려온 원자재 중개업체들의 맨얼굴을 보여준다. 그것은 현대 자본주의의 가장 노골적인 몰골이라고 할 만하다. 그들이 만든 세상에서 우리 경제와 삶이 운영되고 있다. 세계 5대 석유 중개 업체의 일일 거래량은 세계 하루치 석유 수요의 25%에 맞먹는 양이다. 세계 곡물과 유지작물 거래의 거의 절반을 세계 7개 곡물 중개업체가 책임진다. 전기자동차의 필수 원자재인 코발트는 글렌코어가 세계 공급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원자재 중개 업체들은 근래 음지에서 나오고 있다. 서방의 규제당국도 이들에 대한 감시와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들은 “아직도 원자재는 돈과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확실한 지름길 중 하나”라며 “원자재 중개업체가 앞으로 한동안 국제 정세에서 ‘진짜 주인공’이 되리라는 사실은 분명하다”고 전망한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민일보 신문구독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