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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노트] 하루하루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마녀체력(‘걷기의 말들’ 작가·생활체육인)


예전에 경매 넘어간 전셋집
땜에 겪은 고통 잊히지 않아
전세사기 범죄자 벌 받기를

한 아파트에서 20년쯤 살고 있다.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입주했는데 어엿한 서른 살 어른이 됐으니. 그동안 이사를 안 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아파트 옆이 잘 조성된 벚꽃나무 산책길이다. 깨끗하면서도 녹음이 우거져서 걷거나 달리기에 좋다. 저렴한 가격으로 다양한 운동을 배울 수 있는 구민 체육센터도 바로 코앞이다. 내가 ‘마녀체력’이 되는 데 커다란 몫을 한 일등공신들이랄까.

서울 강북 변두리 지역에 살고 있어서 다른 동네로 쉽사리 옮기기 어렵다는 경제 사정도 이유 중 하나겠다. 하긴 물려받을 재산 하나 없는 월급쟁이는 아파트 평수를 늘려가며 이리저리 옮겨 다녀야 돈을 벌 수 있단다. 그것도 부지런하든지, 이재에 밝은 사람한테나 통하는 치부법이다. 가계부를 제대로 안 쓰고 집안 살림 꾸려 나가는데도 절절매는 형편이니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는다.

이사를 안 한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다. 이사하는 데 이미 진을 다 뺐기 때문이다. 신혼 시절, 회사 근처에서 1년 정도 머물렀다. 출산 후 아이를 맡기려고 시댁 근처로 옮겨온 뒤로 지금 사는 동네를 벗어난 적이 없다. 그렇다고 이사를 안 했다는 말이 아니다. 돈 없고 백 없는 맞벌이 부부의 이사 전력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마치 하늘에 계신 누군가가 ‘이 부부는 이사를 통해 심신 단련 좀 시켜야겠다’고 마음먹은 것 같았다.

10년간 다섯 번쯤 이사했나. 그야말로 전셋집을 전전한 셈이다. 아이와 살기에 좋은 조건을 찾아 여기저기 헤매고 다녔냐고? 그럴 리가 있나. 부부 둘 다 성격이 무던한 편이고, ‘집에서는 잠만 자자’라는 하숙생 기질이 다분하다. 어차피 전셋집이니 큰 불편이 없는 한 오래 사는 것이 여러모로 이익이었다. 세입자 마음은 그랬는데 정작 집주인 사정이 따라주질 않았다.

멀쩡히 살던 집이 팔렸다질 않나, 결혼한 아들 부부가 들어오기로 했다질 않나. 세입자가 거부 못 할 다양한 사정을 대면서 집을 비워 달라고 했다. 편집자인 나는 책이 얼마나 많았던지 아무리 이삿짐센터를 이용해도 그 고된 정리는 거의 내 몫이었다. 하도 짐 싸기와 풀기에 단련돼서 ‘생활의 달인’ 프로그램에 나가도 될 지경이었다. 부동산 사장님과 눈치가 ‘척 하면 삼천리’인 살가운 사이가 됐다.

마지막 전셋집을 얻을 땐 아예 집주인이 꼭대기에 살고 있는 번듯한 4층 빌라를 선택했다. 그동안 저축해 놓은 돈을 몽땅 쓸어 넣었고, 은행에서 대출까지 받았다. 이제 우리가 집을 사서 나가지 않는 한 여기서 쫓겨날 일은 없겠지. 불행하게도 그 집은 우리의 ‘마지막’ 전셋집이 되지 못했다. 역시나 집주인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버렸다. 은행 빚을 갚지 못해서 집이 통째로 경매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 빌라에 세 들어 사는 세입자만 여덟 가구였다. 그때부터 생전 처음 겪는 지옥의 나날이 시작됐다. 경매 관련 책을 읽어 봐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저런 전문가들에게 상담했는데 제각각 의견이 달랐다. 세입자들은 저녁마다 모여 대책을 의논했지만 별 뾰족한 수는 보이지 않았다. 남편도 나도 밤에 잠을 자지 못했다. 어두운 방안에 끝없는 한숨 소리만 가득했다. 까딱하면 둘이 개미처럼 일해서 번 전 재산을 다 날리고 길거리에 나앉을 판 아닌가. 하루하루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멀쩡하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천만다행으로 금전 손해는 보지 않은 채 해결이 되긴 했다만 당시 세입자들이 겪은 피폐한 몰골과 정신적 고통은 20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 오죽하면 “내 집 사면 평생 이사를 안 하겠다”고 결심했을까.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 집이란 먹고 자는 공간을 넘어선 생명줄과도 같다. 전세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은 지금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다. 매일 밤잠을 못 이루며 피눈물을 쏟고 있으리라. 집 갖고 사기 친 범죄자들은 삼대 내리 생지옥 사는 벌을 받기를.

마녀체력(‘걷기의 말들’ 작가·생활체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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