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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엄홍식씨 마약 사건

임성수 사회부 차장


배우 유아인(본명 엄홍식·37)씨 마약 투약 사건은 한 편의 신작 개봉 영화 같다. 유명 배우가 코카인 등 다섯 가지 마약을 투약한 혐의를 받고, 주변 인물은 모세혈관처럼 어지럽게 얽혀 있다. 경찰 수사는 지루할 정도로 더딘 반면, 전직 마약 수사 검사들로 구성된 초호화 변호인단은 날렵한 변호 솜씨를 과시한다. 수사 기간이 100일이 넘고, 범정부 차원에서 마약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와중에도 1차 결말은 구속영장 기각. 유씨가 코카인 중독 재벌 3세 조태오로 출연했던 영화 ‘베테랑’의 스핀오프(spin off·파생작)로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유씨는 지난 3월 첫 경찰 조사를 마치고 “저의 일탈 행위들이 누구에게도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식의 자기합리화 속에서 잘못된 늪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구에게도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유씨의 묘한 언급은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말한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을 연상시킨다. 사강도 유씨처럼 코카인 투약 혐의로 법정에 선 뒤 ‘자기 파괴’를 언급하며 자신을 변호했다. 그러나 유씨의 일탈은 이미 자유의 한계를 넘어섰다. 그의 마약 투약이 드러나면서 남의 삶에 매우 구체적 피해를 끼쳤기 때문이다. 유씨가 주·조연으로 출연했던 영화와 드라마는 수백억원이 투입됐지만, 그를 캐스팅했다는 이유로 날벼락을 맞았다. 그의 번듯한 이미지를 믿고 CF를 맡겼던 광고주도 유씨 일탈의 부수적 피해자다.

그럼에도 유씨가 연예인이라고 해서 더 가혹한 수사와 여론재판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의 마약 투약이 실망스러울 수는 있겠지만, 그에게 청소년의 모범이 되라거나 도덕 교사가 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유씨는 국민을 대표하거나 공공의 일을 맡은 공직자도 아니다. 그래서 그의 마약 스캔들은 국회의원 김남국씨의 코인 투기처럼 극한의 혐오와 경멸을 불러일으키진 않는다. 유씨는 형사처벌 이전에 대중의 손가락질이라는, 연예인으로서는 치명적 형벌을 이미 받고 있다.

반대로 유씨가 유명인이어서, 돈과 인기가 있다고 해서 일반 마약사범과 다른 특권적 대우를 받아서도 안 된다. 하지만 수사 과정은 영 뒷맛이 개운치 않다. 유씨가 배우 유아인이 아닌, 그저 평범한 대한민국 37세 남성 엄홍식씨였다면 법원이 그때에도 구속영장을 기각했을까? 5가지 마약을 투약한 범죄 혐의자가 경찰 출두 당일에 조사를 일방 취소하고, 혐의를 부인해도 ‘방어권 보장’을 위해 불구속 수사를 받을 수 있을까? 전직 검사장 출신 변호인의 전관예우 없이도 법원이 “증거를 인멸하거나 도망의 염려가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해줄까? 이 세 가지 질문에 흔쾌히 ‘그렇다’고 답할 수 없다면 그의 불구속은 시민의 보편적 권리가 아닌 상류층의 사치스러운 특권일 뿐이다. 법원은 지난해 9월 필로폰 투약이 적발된 가수 돈스파이크가 혐의 대부분을 인정했는데도 “도망할 염려가 있다”는 이유로 그를 구속했다.

“이거 푸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 30분? 길어야 한 시간이야. 이 XX야.” 영화 베테랑 속 조태오는 경찰에 잡혀 수갑을 차자 이렇게 호언장담한다. 경찰은 “20년 걸린다, 이 XX야”라고 맞받아치고, 결국 영화는 조태오가 구속 기소돼 재판받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현실 속 유씨는 영장실질심사를 마치고 만 하루도 안 돼 수갑을 풀고 자유를 얻었다. 현실이 영화만큼 정의롭고 통쾌하길 기대하진 않는다. 다만 최소한의 절차적 공정은 지켜져야 하지 않을까. 수많은 다른 마약사범처럼 유씨도 배우 유아인이 아니라 시민 엄홍식으로 수사받고 재판받길 바란다.

임성수 사회부 차장 joyls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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