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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줄어서…’ 검은돈 세탁 조직원들의 수상한 반성문

警, 유령법인 설립 일당 11명 검거
6년간 범죄조직에 대여 수십억 챙겨
5명 구속… 명의 대여자 62명도 입건

대포통장을 대여해 준 조직 내부에서 공유되던 반성문 매뉴얼. 서울경찰청 제공

“사랑스러운 아내를 만나 두 아이를 낳고 어떻게든 생계를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정부 정책으로 근무 시간이 줄면서 가정을 꾸려나가기 어려워졌습니다. 통장을 빌려주면 사례금을 준다는 말에 혹해…”

얼핏 보면 피치 못할 사정으로 범죄에 연루된 가장이 죄를 뉘우치면서 법원에 제출한 반성문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기업형 대포통장 유통 조직 내부에서 공유되던 ‘반성문 견본’의 한 부분이다. 이 조직은 수사가 들어올 것에 대비해 통장 명의 대여자에게 이런 반성문을 미리 준비하도록 했다. 꼬리 자르기 목적도 있었다.

서울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는 가족이나 지인 등 이름으로 유령법인을 설립한 뒤 해당 법인 명의로 대포통장을 개설해 범죄 조직에 유통한 일당 11명을 검거했다고 1일 밝혔다. 이중 30대 총책 이모씨 등 5명은 구속됐다. 일당에게 명의를 빌려준 62명도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등의 혐의로 입건됐다.

일당은 2016년 6월부터 지난해 3월까지 약 6년 동안 152개에 이르는 유령법인을 설립한 뒤 법인 명의로 대포통장 713개를 개설, 보이스피싱 조직 등에 대여한 혐의를 받는다. 경찰은 이들에게 범죄단체조직 혐의도 적용했다. 총책 이씨 등은 대포통장 1개당 매월 180만~200만원씩의 대여료를 받았다. 이렇게 챙긴 수익금이 약 45억원인 것으로 조사됐다. 일당에게 대포통장을 빌린 조직들이 세탁한 범죄수익금은 6조45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경찰은 본다.

총책 이씨는 “대포통장 유통 사업이 돈이 된다”며 또래 지인들을 불러 모았다. 이들은 총책, 관리책, 현장책, 모집책 등 역할을 분담했다. 이씨가 총책으로 전체 업무를 지시했고, 관리책은 조직원 관리, 모집책은 대포통장 명의 대여자를 찾았다. 현장책은 이를 바탕으로 유령 법인을 만들고 대포통장을 개설했다.

일당은 꼬리가 밟히지 않기 위해 치밀한 은폐 전략을 썼다고 한다. 텔레그램이나 위챗 등 추적이 어려운 해외 기반 메신저를 사용했고, 경찰에 붙잡히더라도 조직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사응대 매뉴얼’과 ‘반성문 양식’까지 마련했다. 이들이 사용한 반성문 양식 등은 인터넷에서 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경찰 수사망을 피하기 위해 기동성이 좋은 ‘캠핑카 사무실’까지 사용한 것으로 파악됐다.

일당은 명의 대여자가 세탁된 자금을 인출한 뒤 도망갈 것을 우려해 대포통장 법인 명의자를 모두 모집책의 가족 등 주변인물로 확보했다. 이와 함께 명의 대여자에게 다달이 20만~60만원을 지급하면서 이탈을 방지했다.

경찰 관계자는 “조직원들은 수사에 대비해 총책이 정한 구체적 행동수칙에 따라 행동하는 등 조직적·계획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며 “형량 감소를 위한 반성문 양식, 조사 응대 매뉴얼까지 제공하는 등 조직 전모가 드러나지 않도록 배후에서 조종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경찰은 압수한 대포통장 등을 바탕으로 범죄수익금을 세탁한 범죄 조직에 대한 수사를 이어나갈 방침이다.

성윤수 기자 tigri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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