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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에서] 빈자의 친구들

강준구 사회2부 차장


최근 몇 차례 찾은 서울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은 10여년 전과 크게 바뀐 게 없었다. 다닥다닥 붙은 벌집 주택,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골목, 성인 남성 한 명이 몸을 펴기도 어려운 복도. 겉은 벽돌이지만 골조는 목조여서 방음과 차열도 거의 되지 않는다. 빌딩으로 둘러싸인 1000평 정도의 땅에 84개동 730여개의 쪽방이 있다. 서울시립 돈의동 쪽방상담소 옥상에서 내려보면 밖에선 보이지 않는 도심 속 작은 빈자(貧者)들의 섬이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에 500여명이 살고 있다.

이곳의 여름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옥과 같았다고 한다. 창문은 찾아보기 힘들고, 좁은 복도 곳곳 쪽방이 내뿜는 열기는 집안 전체를 달궜다. 그럼에도 밥을 해먹을 데가 없어 방에서 휴대용 가스레인지로 요리를 했다. 장마 시즌이 다가오면 습기, 땀, 열이 뒤섞이며 좀처럼 숨쉬기도 어려운 지경의 연속이었다. 환경을 통째로 바꿔보려는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잠시라도 떠날 곳이 없는 이들, 또 새롭게 찾아오는 사람들, 벽·지붕이 낡아 수리조차 하기 어려운 건물 때문에 물리적인 환경을 바꾸는 게 쉽지 않았다.

이곳의 여름 환경을 드라마틱하게 바꾼 건 에어컨이었다. 쪽방상담소를 위탁 운영하는 구세군은 종로구청 등의 지원을 받아 2022년 에어컨 28대를 설치했다. 이어 서울시가 60대를 지원해 모두 84개동에 88개의 에어컨을 달았다. 골목 곳곳에는 열을 식힐 수 있는 쿨링 포그가 설치됐다. 지열을 식히기 위해 소방서에서 나와 물을 뿌리는 것에서 착안했다. 한 주민은 “불과 몇 년 전에 비해 지금은 정말 여름을 나기 좋아졌다”며 “새로 시작된 이런 사업이 계속 유지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작은 변화를 만들어낸 건 현장 행정이다. 정해진 예산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를 더 내기 위해 발 벗고 나선 공무원들의 덕이다. 현장에서 만난 행정안전부 재난관리실 직원들은 땀에 전 티셔츠와 얇은 바지 차림에 큰 배낭을 메고 있었다. 전국 쪽방촌을 다니며 폭염 대비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고 했다. 이들은 “많은 곳을 돌아다녀봤지만 돈의동이 다른 곳에 비해 설비가 가장 잘돼 있다”며 “반면 열악한 곳들도 많아 대책을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낡은 건물에 에어컨을 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도무지 설치 공간이 나오지 않아 억지로 패널을 달거나 실리콘 등으로 떡칠을 해 복도에 붙잡아 매달았다. 사람 한 명 지나기 어려운 복도에 벽걸이 에어컨을 달면 통행이 어렵다. 그래서 건물 입구 뒤쪽이나 제일 위층 계단에 에어컨을 단 뒤 서큘레이터를 설치해 찬바람을 강제로 건물 안으로 밀어 넣기도 한다. 전기 배선이 낡아 억지로 전선을 빼거나 공사를 새로 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쪽방 건물 지붕에 차열페인트를 바르기 위해 입찰을 붙였는데 3~4개 업체가 “지붕이 낡아 위험하다”며 철수해버린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악전고투 끝에 설치된 에어컨 수혜를 받는 사람은 470명 정도다. 서울시는 나머지 30여명도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올해 에어컨을 95대로 늘릴 예정이다. 또 인근 민간 식당을 동행 식당으로 지정해 하루 8000원 단가로 주민이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했다. 쪽방상담소 관계자는 “한 끼 정도는 집에서 해먹지 않고 밖에서 드실 수 있게 됐다”며 “에어컨과 동행 식당에 대한 주민 만족도가 가장 높다”고 전했다. 많은 위정자가 민생을 말하지만 실제 세상은 이렇게 현장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공공 종사자들에 의해 변화한다. 사명감을 갖고 일하는 이들이 마땅한 존중을 받는 세상이 됐으면 한다.

강준구 사회2부 차장 eye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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