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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의 딸’ 편견 없이 봐준 사람들… 에세이에 담다

[책과 길]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지음
마이디어북, 320쪽, 1만7000원

정지아 작가는 고향인 전남 구례군 지리산 아래 마을에서 어머니를 돌보며 글을 쓴다. 구례에서 쓴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50대 후반에 처음으로 유명 작가가 됐다. 마이디어북 제공

소설가 정지아의 첫 에세이집이 나왔다. 지난해 하반기 출간된 이후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쓴 그 정지아 작가다. 그런데 50대 후반에 첫 에세이집이라니 좀 늦다 싶다. 이제야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었을까. 혹은 ‘빨치산의 딸’이라는 작가의 배경이 자기의 이야기를 써야 하는 에세이를 피하게 했을까.

정지아는 1990년 아버지 이야기를 쓴 실록 ‘빨치산의 딸’을 발표하며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그 후로 ‘빨치산의 딸’은 정지아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정지아는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성공한 후 “‘빨치산의 딸’에서 해방됐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그 해방이 작가에게 자기 이야기를 솔직하게 쓸 용기를 주었을까.


정지아가 느긋한 사람이라서 첫 에세이집이 이제야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책에서 “무엇 하나 잘하는 것 없고 게을러터져서 세상만사 귀찮은 아줌마”로 자신을 설명했다. 친구를 사귀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했다. “나는 10년을 봐도 아직 친구가 아닌, 친구 사귀는 데 참으로 긴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다.”

늦게 도착하긴 했지만 정지아의 에세이집은 ‘빨치산의 딸’에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그의 지나온 날들을 보여준다. 책은 작가 에세이에서 기대하는 바를 넉넉하게 채워준다. 작가의 과거와 일상, 생각을 엿보게 해준다.

정지아가 첫 에세이집의 주제로 술을 선택한 점도 흥미롭다. 여성 작가의 술 이야기는 흔치 않다.

“싱글몰트계의 롤스로이스라 불리는 맥켈란 1926이 내 잔에도 가득 찼다… 맥켈란 1926을 입에 오래 머금은 채 나는 실패한 사회주의자인 내 아버지를 떠올렸다… 젊은 날에는 똑같이 민족의 통일과 평등을 주장했으나 두 사람의 끝은 전혀 달랐다… 참으로 다행 아닌가? 성공할 기회가 없어 타락할 기회도 없었다는 것은!”

술을 끄집어 낸 것은 술을 함께 마시며 마음을 나눠온 사람들을 얘기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보인다. 정지아는 “나를 술꾼으로 만든 건 사람이다”라고 했다. 빨갱이의 딸, 가난한 소설가, 시간강사로 살아온 정지아의 삶을 따뜻하게 만들어준 사람들, 친구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들 중에는 세든 집에서 쫓겨나게 생긴 정지아 모녀에게 자기 집 방을 내어주려던 중학교 시절 선생님도 있었다. “빨갱이의 딸을 편견 없이 봐준 고마운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나를 외면한 선생들보다 그이의 따뜻한 시선이 더 불편했다… 선생이라면 호의를 받아들이는 데도 여유가 필요함을 알았을 것이다. 그때의 나에게는, 열넷의 나에게는 그런 여유가 없었다.”

정지아는 문학과 친구들, 그리고 그 사이에 늘 있었던 술에 의지하며 낙인 찍힌 삶을 지나온 것인지 모른다.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라는 책 제목은 그래서 마냥 낭만적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그는 “술이 있어서 누군가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그 이야기들이 모여 한 권의 책이 되었다”고 말했다.

수록된 34편의 글은 하나같이 따뜻하다. 그것이 정지아의 마음이라는 게 느껴진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아픔을 진술하거나 그의 삶을 억누른 것들을 고발하지 않는다. 그의 삶을 환하게 만들어준 선의들에 대해 묘사한다.

에세이집은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 선보인 사투리와 유머가 정지아의 스타일로 정착했음을 알려준다. “나는 유기농으로 키웠는디 참말로 유기농잉가는 나도 몰라라. 그런갑다, 허고 잡수씨요” 같은 사투리 문장을 풍부하게 인용하고, “그날 처음으로 30년간 나의 일부였던 식도와 위의 위치와 모양을 구체적으로 체감했다. 위스키가 훑고 간 자리마다 짜릿한 쾌감으로 부르르 떨렸다” 같은 능청스런 묘사를 경쾌하게 이어간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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