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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그짓이나 해”… 택배기사 죽이는 끔찍한 문자들 [이슈&탐사]

택배노동자 24시 따라가 보니
“내 택배 먼저 갖다줘” 쏟아지는 특별대우 민원
도둑누명·허위신고에도 대응 못해
“‘연봉 1억 택배기사’는 허상”


지난 11일 경기 안성시 모처에서 배달 일을 하던 택배기사 A씨(41)는 트럭 탑차에 동승해 안전벨트를 매려는 기자에게 “그럴 필요 없다”고 말했다. 낡은 연립주택 건물이 끝없이 이어지는 길에서 그는 1분도 안 되는 거리를 주행한 뒤 트럭에서 내리기를 반복했다. A씨는 박스 여러개를 짊어지고 가파른 언덕길과 5층 빌라 계단을 거듭 오르내렸다. 그는 “나 혼자서 이걸 ‘지옥의 계단’이라 부른다”고 했다.

청바지가 없어졌어요

숨을 고르던 A씨가 전화를 받더니 차분히 “정해진 대로의 배송 경로가 있습니다. 그건 어려우세요(어렵다)”라고 말했다. 한참을 실랑이하던 A씨는 “정 급하시면 편의점을 가시라”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휴가를 가야 하니 주문한 수영용품 택배를 빨리 갖다 달라”는 전화였다. 매일같이 이런 요구를 받는 A씨는 똑같은 대답을 반복하는데, 고객은 막무가내로 짜증을 내는 때가 잦다. A씨는 “누군가 한 사람의 요구를 들어주느라 경로를 벗어나면 모든 스케줄이 틀어진다”며 난감해했다.

A씨는 초년병 시절엔 몸이 힘들어 탑차에 앉아 엉엉 울었다. 이제 베테랑이 된 그에게 하루 11시간 주6일 근무, 만보기에 2만5000보를 찍어주는 ‘지옥의 계단’은 익숙해졌다. A씨를 진정으로 힘들게 만드는 것은 그의 노동 범위 밖에서 이뤄지는 고객의 엄포다. “나한테 빨리 와 달라”는 특별대우 요구 민원은 오히려 온건한 편이다. 다짜고짜 배송오류와 금전 보상을 주장하는 고객을 만날 때도 많다.

택배기사 A씨가 경기 안성시의 한 빌라에서 배송 업무를 하고 있다. A씨가 이렇게 오르내리는 건물은 하루에만 200곳에 달한다. 안성=권현구 기자

그런 때면 일과가 꼬이는 것은 물론이며, 더러는 누명을 쓰고 경찰 조사를 받기도 한다. 그가 배달을 마친 한 고객은 지난해 말 “14만원짜리 고급 청바지가 없어졌다”는 불편신고(클레임)를 접수했다. 정해진 곳에 두고 온 택배였다. A씨는 고객과 옥신각신하다 절반인 7만원을 송금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일당 절반에 달하는 돈이 한순간 사라졌지만 그는 다음 배송지로 차량을 몰아야만 했다.

“내 휴대전화를 훔쳤다”며 A씨를 경찰에 신고한 아주머니도 있었다. A씨가 조사를 받은 이후 휴대전화는 그 아주머니의 집에서 발견됐다. 어떤 노인은 탑차를 보고 놀라 넘어졌다며 A씨를 붙들고 “병원비를 내놓으라”고 했다. 노인이 넘어질 때 차량은 정차 상태였다.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한 사람들은 그에게 “그러니까 택배를 하지” 따위의 문자를 보내곤 했다. A씨는 “싸워봤자 택배기사만 손해인 점을, 어떤 이들은 잘 알고 활용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A씨가 일하는 회사는 A씨가 접하는 고객의 악성민원과 폭언에 뒷짐만 지고 있다. 고객과의 분쟁이 생기면 기사가 알아서 해결하라는 식이다. 무언가를 바로잡을 시간도 권한도 없는 A씨는 감정을 누르고 일단 사과하는 경우가 많다. 고객 클레임이 일정 건수를 웃돌면 연 1회 ‘우수사원’에게 주어지는 보너스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잘잘못을 가리는 것은 어쩌면 사치스럽다. 클레임을 많이 받는 택배기사로 찍히면 계약이 해지될 수도 있다.

평생 그 짓거리나 해라

국민일보는 택배기사들이 받은 고객의 문자메시지 화면을 여럿 볼 수 있었다. 고객은 끝없이 재촉하고, 택배기사를 멸시했다. 고층아파트를 구역으로 둔 택배기사들은 엘리베이터에 오르내릴 때 입주민으로부터 ‘계단을 이용하라’는 말을 한번씩은 들어 봤다고 했다. 어떤 아파트는 택배기사에게 장당 수만원의 출입카드를 판매한다. 택배기사들은 “출입카드가 없으면 배송을 할 수 없으니 울며겨자먹기로 구매한다”고 했다. 입주민이 불러서 가는 길인데, 그 길의 통행료를 내야 하는 것이 택배기사들의 노동 현실이다.

경기 남양주시에서 택배기사로 일하는 정병기(47)씨에게 전화를 걸어 불만을 제기하던 어떤 고객은 “전화요금이 많이 나왔다”며 1만원을 달라고 요구했다. 정씨는 농담인 줄 알았지만, 그 고객은 정씨 상사를 통해 기어코 1만원을 받아냈다. 물건을 내려놓는 그에게서 땀냄새가 난다며 “교육 좀 시키라”는 민원이 접수된 적도 있었다. 늦은 시각까지 포기하지 않고 배송을 마칠 때 그는 “잘 시간인데 왜 이제 오느냐”는 말을 듣는다.


택배기사들이 고객들로부터 가장 빈번하게 들은 말을 워드클라우드 프로그램으로 추출한 결과. 대표적으로 “고객이 무조건 왕이다” “네가 그냥 참아라” 등 문장으로 재구성된다. 욕설과 비속어의 경우 모두 ‘욕설’ 이라는 단일 단어로 집계됐다.

택배기사들은 “불가능한 일을 못한다는 이유로 죄송해야 한다”고 했다. 고객은 택배기사가 이미 지나친 배송지로 얼른 돌아와줄 것을 요구하고, “지금 집에 없으니 10분만 기다려라”라고 쉽게 말한다. 그래도 택배기사는 일단 ‘친절한 대응’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러도록 교육받았고, 고객의 불만은 임금 삭감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물량을 소화하기도 바쁜 현실에서 변호사를 선임하는 등 갑질에 맞서기 위한 ‘정식 대응’은 언감생심이다.

택배기사들이 겪는 감정노동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기사의 연락처를 공개하지 않는 회사도 있다. 쿠팡은 고객이 고객센터를 거치지 않고 기사에게 직접 연락하는 것을 금지한다. 직원을 위한 이런 체계가 확대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지만,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못 된다. 전국택배노조 관계자는 “결국 감정노동 대상이 택배기사에서 콜센터 노동자로 전가되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

택배기사들을 괴롭히는 또 다른 존재도 있다. 험한 노동을 한다지만 소득이 많지 않으냐는 시선이다. A씨에게는 1600원의 기본 배송단가 중 750원이 손에 쥐어진다. 여기서 부가세 사무실비 기름값 보험료를 제외해야 하는데, 자동차 할부금까지 빠져나가야 하는 초임 기사들은 통념보다 훨씬 적은 돈을 번다. 그는 “‘연봉 1억원 택배기사’는 극소수에 불과한 허상”이라고 말했다.

이슈&탐사팀 김지훈 정진영 이택현 이경원 기자 germany@kmib.co.kr

김지훈 기자 germany@kmib.co.kr
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
이택현 기자 alley@kmib.co.kr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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