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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나잇값

이용상 산업2부 차장


한심한 행동을 하는 어른에게 “나잇값을 하라”고들 하던데 나이를 가격으로 환산하면 얼마쯤 할까. 나이가 들수록 값어치가 높아지는 게 맞긴 한 걸까. 건강, 체력, 순발력 등 육체적인 면에서 청년보다 우위에 있다고 보긴 힘드니 그들의 가치는 아무래도 경험에서 찾을 수 있겠다.

인생은 수많은 ‘A·B 테스트’의 연속이다. 고교 졸업 후 대학에 갈 것인가, 바로 돈을 벌 것인가. 취업할 것인가, 장사할 것인가. 이 부장에게 줄을 설 것인가, 박 부장 라인에 설 것인가. 때려치우고 이직할 것인가, 꾹 참고 다닐 것인가. A·B 테스트의 결과 데이터를 많이 확보할수록 또 다른 선택의 순간에서 더 나은 결정을 내릴 확률은 높아진다. 굳이 나잇값이란 걸 매긴다면 수많은 A·B 테스트의 결과값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적잖은 비중을 차지할 거다.

김성원(가명)씨는 국내 한 완성차 회사에서 25년을 근무한 뒤 상무로 은퇴했다. 자동차 관련 협회 관계자의 부탁으로 2019년부터 협회 일을 도왔다. 협회 관계자는 “그가 합류한 뒤 조직이 탄탄해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지난 19일 협회 회원 명단을 최신화할 필요가 있겠다는 얘기가 나오자 그는 그날 바로 전체 55개 회원사에 직접 연락을 돌리기 시작했다. 지난 6월 광주 출장 때는 참여자 45명의 KTX 좌석번호, 출발시간, 탑승 위치 등을 전부 엑셀 파일로 정리한 뒤 출력해 참가자 전원에게 일일이 나눠줬다. 이런 모습을 보며 2015년 개봉한 영화 ‘인턴’에 나온 일흔 살 벤(로버트 드니로)이 떠올랐다.

벤은 40년 동안 일한 회사를 은퇴한 뒤 한 스타트업에 인턴사원으로 입사한다. 며칠째 일거리가 없던 그는 사무실 책상에 쌓여 있는 택배 물품을 치우는 등 잡일부터 시작한다. 여태까지 축적한 수많은 A·B 테스트 결과값을 바탕으로 연애 상담, 월셋집 구하기, 가정불화 등 젊은 사원들의 고민을 해결해준다. 젊은 여성 최고경영자(CEO) 줄스가 고비를 겪을 때마다 지혜를 보태 실패를 막았다. 벤은 영화에서 이런 말을 한다. “경험은 나이 들지 않아요. 경험은 결코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죠.”

김봉식씨는 ‘킹호텔’에서 가장 오래 일한 직원이다. 제약회사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할 때 술에 취해 킹호텔 로비에서 잠들었는데 새벽에 깨보니 직원들이 다들 웃고 있었다. ‘여긴 뭔데 다들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지? 여기서 일하면 나도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꿈이 생겨 킹호텔에 취직했다. 30년 동안 도어맨으로 일하며 호텔 입구에서 가장 먼저 손님을 맞이했다. 봉식씨는 그동안 겪은 수많은 에피소드와 꿈 얘기를 많은 후배들 앞에서 밝혔다. 최근 종영한 JTBC 드라마 ‘킹더랜드’에서 이 장면을 보며 나는 봉식씨가 꽤 멋진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의 나잇값은 결코 싸지 않다. 나는 이들에게서 두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첫 번째는 하는 것 없이 대접받기만을 바라지 않는다는 거다. 아주 사소한 일에도 주저함이 없다. ‘이 나이 먹고 이런 일을?’이라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세상엔 말만 하는 어른들도 참 많다.

두 번째는 대체로 흥분하지 않는다는 거다. 태어날 때부터 지닌 천성일지도 모르지만 수많은 A·B 테스트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층 커진 예측 가능성이 이런 차분함을 만들었을 거다. 나잇값의 미덕은 평정심이다. 자신과 다른 생각이나 태도를 보인다고 화내지 않는다. 자기 확신에 빠지지 않는 법을 알고 있다는 얘기다. 수많은 A·B 테스트를 통해 자신의 결정이 항상 정답일 리 없다는 겸손함을 갖추게 된 걸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몇몇 멋진 어른을 마주한 뒤 느낀 단상이다. 나도 이렇게 나이 먹고 싶다.

이용상 산업2부 차장 sotong20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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