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엔 죄의식을, 관리자에겐 책임을, 노동자에겐 재량권을 [이슈&탐사]

<⑥·끝> 당신은 자유로우십니까


갑질과 감정노동의 실태는 사회에 만연하며 모든 일하는 사람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모두가 어렴풋이 심각성을 아는 문제라는 점에서 갑질과 감정노동은 명쾌한 해법을 더욱 찾기 어려우며, 입으로 대책을 떠드는 사이 노동자들은 점점 병들어간다. 국민일보가 보도 과정에서 접한 교사, 콜센터 상담사, 경비노동자, 택배기사, 보건의료인들은 공통적으로 “사람이 죽어야만 관심을 갖는다”는 말을 했다. 어느 한 직역에서의 ‘갑질 살인’이 자극적인 문제가 되면 그때마다 반짝 쇄도하는 실태조사에 지치기마저 한다고, 이들은 솔직한 반응을 보였다.

감정노동 문제의 전문가들은 갑질과 감정노동을 둘러싼 문제에 ‘3주체’가 등장하며, 이 주체들의 의식과 역할을 개선해야 한다고 했다. 감정노동 현장에는 우선 민원 응대 공무원과 콜센터, 경비노동자들을 상대로 외부에서 악성민원을 제기하는 소비자가 있다. 그리고 이익을 추구하느라 소비자의 부당한 갑질을 단호히 차단하지 못하고 오히려 노동자를 벼랑으로 내모는 사업장 관리자가 있다. 아무런 재량권이 없이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하는 노동자가 소비자와 관리자 사이에 끼어 있다. 모두가 “나는 갑질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때로는 자리를 바꿔 가며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갑질사회를 만들고 있다.


갑질하는 소비자에게 죄의식을


돈(세금)을 지불했다는 이유로 노동자를 비인격적으로 대하고 더욱 무리한 서비스를 요구하는 사람들의 권리의식은 점점 커지고 있다. 국민일보의 갑질-감정노동 실태조사 결과 “한국사회 속 개인주의가 커지고 있다”는 말에 대한 동의 정도 응답(10점 만점)은 공무원 9.2점, 콜센터 상담사 8.7점, 보건의료인 8.4점, 대리기사 8.2점 등이었다. 지난 7월 서울 서이초 교사의 사건 이후 교직사회의 교권 보호 호소가 시작될 때, 많은 이들은 “무리한 요구에 부딪히는 게 교사들 뿐이 아니다”는 반응이었다. 7개 직역 실태를 전한 보도 이후에도 국민일보에는 “우리도 살려달라”는 다양한 사연이 도착하고 있다.

소비자들의 가혹한 태도 근저에는 물질만능주의가 있다. 민원을 제기하지 않거나 누군가를 괴롭히지 않으면 자신의 몫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다는 불안감이다. 갑질이 때로 달콤한 결과로 이어진다는 잘못된 학습도 이뤄진다. 목소리를 높여 떼쓰기를 거듭했더니 백화점 상품권을 주더라느니, 이런 식으로 대응하는 예산이 애초 다 있는 법이라느니 하는 ‘노하우’가 퍼진 것이다. 많은 감정노동자들은 “온라인 카페에서 서로 배우는 듯하다”고 말했다.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은 “인터넷과 SNS를 통한 소비자들의 과도한 요구나 갑질 사례가 공유되면서 이를 치밀하게 이용하는 소비자 또한 증가했다”고 했다.

이창배 전국대리운전노조 사무국장은 “어떤 고객들은, 사람이 어떤 지점에서 ‘을’이 되는지 정확히 알고 행동한다”고 말했다. 차체가 낮은 차량 운전자가 대리운전 기사를 부른 뒤 일부러 방지턱을 넘게 하고, 차량이 긁히게 하는 사고를 내게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보험 처리만으로도 생계를 위협받는 대리운전 기사들은 이런 때에 어쩔 줄 몰라한다. 이때 이 고객들은 “이렇게 되면 일을 못하게 되신다는 걸 다 안다. 30만원만 주면 알아서 하겠다”고 말한다고 한다.


감정노동 부작용을 지적해온 이정훈 서울시 감정노동 종사자 권리보호센터 소장은 “빨간불에 횡단보도를 건너가면 안 되는 것을 모두가 알지만, 그럼에도 죄의식은 없으니 건너가는 것”이라고 비유했다. 지금은 모두가 모두에게 죄의식 없이 갑질하는 세상이 돼 있고, 서로가 자제를 촉구하기보다는 은연중에 따라하고 있다는 얘기다. 전상원 강북삼성병원 기업정신건강연구소장은 “한국은 (감정노동자 괴롭힘 행위를) 범죄라고 인식하지를 않는다”며 “‘블랙컨슈머’의 정의부터 다시 해 강력한 처벌 인식을 갖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감정노동자 보호 여부, 기업 평가 새 기준으로

갑질과 감정노동의 지속을 소비자들의 이기주의‧권리의식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노동자들이 고통을 받으면서도 감정을 감추는 이유는 이들이 바보라서가 아니라 생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많은 사업장은 매출과 주주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고객을 내부 직원보다 무조건적으로 우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자신의 잘못이 없는데도 일단 사과를 하고, 피해를 전가받으며, 심하게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지 되돌아본다. 학부모 악성민원에 직면한 교사가 교장에게 상담을 요청했다 들은 말, 환자 보호자로부터 얻어맞은 간호사가 수간호사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들은 말은 모두 “네가 잘못한 게 아니냐”였다.

일부 기업은 아예 감정노동을 외주화하는 방식으로 소비자 갑질 문제를 해결할 책임을 회피한다. 원청은 중간 용역업체의 관리 문제로 치부하고, 중간 용역업체는 원청의 지시에 따른 일임을 말하는 것이다. 어머니를 여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울음을 참고 콜을 마쳐야 했던 한 대형 시중은행 콜센터 상담사의 사례(국민일보 9월 20일자 4면 보도)는 시사적이다. 이 은행은 국민일보에 “협력업체에 대해서는 용역업체가 자체적으로 계약을 맺고 업무와 인사 등 모든 것을 관리한다”고 했다. 관리자들이 악성민원에 대응하는 기준을 수립해 두고 일관적으로 적용하며, 정확히 소비자들에게 알리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사회가 발전한 만큼, 업무와 무관한 친절도까지 노동자의 인사에 반영하는 제도가 개선돼야 한다는 제언도 많다. 경비노동자와 택배기사, 민원 담당 공무원들의 일터에서 이 같은 친절도 평가는 간편히 고객의 불만 횟수 정도로만 계량화되는 실정이다. 사실상 일방적인 주장과 ‘별점’이 생계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많은 노동자들은 일단 잘못했다고 고개를 숙이고, 정신건강이 저하되고 있다. 관리자가 노동자들에게 스스로 갑질과 악성민원을 끊어낼 수 있는 재량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한 콜센터 상담사는 국민일보 보도에 “제발 전화를 끊을 수 있게 해 달라”는 댓글을 남겼다.


이익을 우선시하는 기업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소비자들이며 이에 기반한 새로운 문화가 형성돼야 세상이 변할 것이란 말도 있었다. 노동자를 ‘내부고객’으로서 우대하며 갑질 소비자를 단호히 대처하는 기업에 ‘돈쭐’을 내주는 관행만이 갑질과 감정노동 문제를 차단할 유의미한 강제력이 될 것이란 시각이었다. 시민사회에서 ‘GWP(훌륭한 일터)’로 회자된 사례는 미 사우스웨스트항공이다. 이 항공사 회장은 상습적으로 불만을 제기하는 여객에게 “그동안 감사했다”는 이메일을 보냈다고 한다. 갑질과 감정노동 문제의 끝에서 지적되는 열악한 근무 조건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이남신 서울노동센터 소장은 “당사자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노조나 자조 모임이라도 있으면 피해자에 대한 사후조치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감정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모는 갑질의 지속 이유는 다양한 원인으로 분석돼 왔다. 혹자는 출세와 권력을 지향해온 유교사회의 뿌리깊은 DNA를 말하기도 했고, 군사정권의 잔재로 갑질 문화를 설명하는 이도 있다. 한편으로는 양극화 심화로 각박해진 사회가 갑질을 부추기며, 갑질을 당하는 이가 더욱 가혹하게 또 갑질을 하고 있다는 문제의식도 제기됐다. 분명한 사실은 현재 한국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갑질사회이며, 이 책임을 모두가 남의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성종 감정노동전국네트워크 공동운영위원장은 “온 국민이 감정노동의 주체와 상대방이 되고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며 “감정노동자를 대하는 올바른 자세가 교육 과정에 포함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슈&탐사팀 이택현 정진영 김지훈 이경원 기자 alley@kmib.co.kr

이택현 기자 alley@kmib.co.kr
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
김지훈 기자 germany@kmib.co.kr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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