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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으로 불렸던 느린학습자 아이, 결국 은둔형 외톨이로

[장애도 비장애도 아닌 경계인들]

게티이미지

느린 학습자들은 교육과 취업 등 생애 중요 단계에서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채 법과 제도의 경계선 밖에 머물게 된다.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벽은 학교다.

자녀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느린 학습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김민희(가명)씨는 “우리 아이가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걸 본 선생님의 권유로 지능 검사를 받게 됐다”며 “아이가 남들보다 발달이 조금 느리다는 생각은 했지만 검사를 받는 게 괜히 유난 떠는 것 아닌가 싶어 망설였다”고 말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느린 학습자는 더 큰 곤경에 놓일 수 있다. 평균 지능을 가진 또래와 함께 수업을 받기에는 따라가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운 좋게 도움반(장애학생 학급)에 들어간다 해도 다른 측면에서 수업 수준에 적응하지 못하는 딜레마가 발생한다. 김씨는 “초등학교 고학년까지는 어느 정도 일반반 수업 진도를 따라간다. 그런데 이후 자율성·창의성이 요구되는 수행평가나 또래와 협력해야 하는 조별 활동이 많아지면 (느린 학습자들은) 거의 학습과 멀어지게 된다”고 말했다.

‘빌런’으로 불리는 느린 학습자

느린 학습자 김도우(16·가명)군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엄마에게 “학교 가기 싫다”며 떼를 썼다. 이유를 묻자 “친구들이 놀아주지 않는다”고 했다. 초등학교 1~2학년까지만 해도 함께 어울리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학년이 올라가면서 관계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느린 학습자들은 또래 사이에서 ‘빌런(villain)’으로 불리기도 한다. 원래는 악당을 뜻하지만, 요즘 학생들 사이에서는 특이한 사람이나 민폐를 끼치는 사람을 낮잡아 부르는 말로 쓰기도 한다. 느린 학습자 아들을 둔 박미경(가명)씨는 지난 7월 아들에게 “우리 반에 느린 친구가 한 명 더 있는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친구는 숙제를 거의 해오지 않고 학교 수업 역시 잘 따라가지 못했다. 아들은 “친구들이 걔를 ‘빌런’이라고 부른다. 아무도 그 친구랑 모둠 과제를 안 하려고 한다”고 전했다. 박씨는 “또래들은 ‘핀트가 조금 다른 아이’를 귀신같이 알아챈다”고 했다.

느린 학습자의 존재를 모르거나 무시하는 교사들도 적지 않다. 김씨는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교사가 아이를 그냥 문제아나 바보 정도로 보셨다. 몰랐으니 그랬겠지만, 반 아이들도 선생님의 시선을 따라 아이를 똑같이 인식하더라”고 말했다.

박씨는 자녀가 올 초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담임교사와 모든 교과 교사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썼다. 느린 학습자인 아들이 또래와 어떤 점이 다르고 미숙한지 이해를 구하기 위해서다. 느린 학습자를 다룬 다큐멘터리 동영상을 편집해 USB에 담고, 느린 학습자들을 위한 교사용 가이드북도 챙겨서 보냈다. 편지를 보내고 일주일 정도 지났을 무렵 학교 측에서 답장이 왔다. ‘아이에게 이런 어려움이 있는 줄 몰랐다. 걱정 말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박씨는 펑펑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학교 수업도 버거운데…취업은 사치

느린 학습자들은 진로를 정하고 직업을 갖는 과정도 녹록지 않다. 일반인과 경쟁해 취업을 준비하는 게 쉽지 않고, 회사에 들어가더라도 조직 구성원으로서 생활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송연숙 느린학습자시민회 이사장은 “인간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취약해 직장 생활에 적응이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한 30대 후반의 느린 학습자가 시민회로 전화를 걸어와 “운 좋게 직장에 들어가도 계속 해고를 당한다”며 어려움을 호소한 일도 있었다.

서울시 경계선지능인평생교육센터와 동대문종합사회복지관 등 일부 지자체 기관에서 취업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지만, 느린 학습자들을 위한 정부의 취업 지원은 전무한 상태다. 부모들은 느린 학습자들을 위한 직업 교육 전문학교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송 이사장은 “고교생 때부터 직업 훈련을 하고 이를 전문대에 올라가서도 배울 수 있다면 느린 학습자들도 충분히 직업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일부는 ‘은둔형 외톨이’로

어릴 때부터 성취 경험을 많이 접해보지 못한 느린 학습자들은 낮아진 자기 효능감 탓에 은둔형 외톨이가 되곤 한다. 21세의 느린 학습자 자녀를 둔 최남주 대안학교 ‘와플’ 대표는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하면 느린 학습자들은 10대에는 실패의 경험만 쌓다가 20대에는 사회에서 고립되고, 30대가 되면 가정에 숨어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송 이사장은 “느린 학습자들이 제때 치료와 관심을 받지 못하면 정신건강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우울증, 강박, 틱, 선택적 함구증, 자해와 극단적 선택까지 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고교 1학년 느린 학습자 딸을 둔 진은선(가명)씨는 “조금이라도 어렸을 때 병원에 갔어야 했다”며 후회했다. 진씨는 아이가 중학교 2학년일 때 ‘아이가 학교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한다’는 교사의 권유로 병원에 갔다가 느린 학습자임을 알게 됐다. 이미 딸은 우울증으로 마음의 문을 닫은 상태였다. 그는 “아이가 뭔가 부족하다는 건 알았지만, 왜 그런 건지 이해를 못하고 다그치기만 한 게 너무 미안하다”고 했다.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심해지면서 조현병 발현으로 이어진 경우도 있다. 93년생 느린 학습자 딸을 둔 장유민(가명)씨는 “아이가 고등학생 때 ‘엄마 애들이 뒤에서 나를 흉보는 것 같아’라고 말을 했었다. 나중에는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병원에 가보니 조현병이었다”고 말했다.

백재연 정신영 기자 energ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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