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의적 접근 환심 산 후 범행… 가스라이팅으로 입막음

[장애도 비장애도 아닌 경계인들]
② 범죄의 표적이 된 느린 학습자


‘느린 학습자’(경계선 지능인)인 A씨는 시아버지의 지인 B씨에게 수개월간 성폭력 범죄를 당했다. A씨 시아버지가 대출 사기를 당한 A씨에게 법적 도움을 주기 위해 B씨를 소개해준 것이 화근이었다. B씨는 서울 강남에 사무실을 두고 변호사 사무장 행세를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상담차 A씨를 만난 B씨는 A씨 인지 능력이 다른 사람보다 떨어지는 걸 알아채고 돌변했다. 곤경에 처해도 비명을 지르거나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한다는 점을 악용했다. B씨는 “변호사와 직접 만나 상담해야 한다” “필요한 서류를 준비해야 한다”며 A씨를 자신의 사무실 등으로 수차례 불러내 성범죄를 저질렀다. 가스라이팅(Gas lighting·심리지배)으로 입막음하며 8개월간 범행을 이어갔다. 1심 재판부는 2020년 1월 “피해자는 경계선 지능장애 등으로 상황 대처 능력이 부족해 범행에 취약한 사람이었는데, 피고인은 이를 역이용해 성폭력 범죄를 저질렀다”며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이는 그대로 확정됐다.

인간관계와 경제활동에서 어려움을 겪는 느린 학습자는 이처럼 범죄에도 취약한 모습을 보였다. 가해자들은 느린 학습자의 ‘결핍’을 노렸다. 호의를 베푸는 척 접근한 뒤 경계를 풀면 원하는 것을 빼앗는 식이었다.

국민일보는 경계선(경계성) 지능인이 피해자로 기재된 형사사건 유죄 확정 판결문 31건을 분석했다. 가장 많은 범죄 유형은 성범죄로 모두 18건(58%)이었다. 금전 범죄(8건), 아동학대(4건), 폭행(1건)이 그 뒤를 이었다.


판결문 속의 느린 학습자들은 각종 범죄에 비교적 쉽게 노출되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중에서도 성폭력에 더 취약했다. 경계선 지능인의 성폭력 및 성매매 피해 실태를 연구한 홍미영 박사는 4일 “인지 능력이 부족해 성에 대한 이해와 정보습득 기회가 제한적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성범죄는 가까운 주변인들에 의해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삼촌과 조카, 교사와 제자, 사장과 종업원 등 면식이 있는 사이에서 벌어진 성범죄가 18건 중 9건에 달했다. 처음 본 관계에서도 가해자가 호의를 나타내면 느린 학습자는 쉽게 경계심을 늦추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성범죄 사건 중 왕래가 적은 동네 이웃이나 채팅 애플리케이션으로 만난 관계가 5건, 아예 모르는 사이는 4건으로 나타났다.

홍 박사는 “지능이 경계에 있다 보니 타인이 호의적으로 다가오면 불순한 의도를 의심하지도 못한 채 신뢰하기도 한다”며 “그렇다 보니 가스라이팅에도 쉽게 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재환 성윤수 기자 j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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