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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알잖아, 믿어도 돼’… 느린학습자 노린 ‘아는 사람들’

[장애도 비장애도 아닌 경계인들]

‘느린 학습자’(경계선 지능인)들과 부모들이 지난달 16일 서울 도봉구민회관에서 자조 모임을 하고 있다. 이날 이들은 짧은 끝말잇기 동화책을 돌려 읽고 직접 시를 써보는 활동을 했다. 자조 모임에서 부모들은 정보를 공유하고 느린 학습자들은 사회성 등을 학습한다. 서영희 기자

느린 학습자(경계선 지능인)의 상대적으로 낮은 지능(IQ 71~84)은 종종 범죄의 표적이 된다. 국민일보가 경계선 지능인이 피해자인 형사사건 유죄 확정 판결문 31건을 분석한 결과 범죄 유형만 다를 뿐 범죄에 노출되는 기본적인 구조는 유사했다. 느린 학습자들은 순수한 호의인지, 가장된 호의인지를 구별하는 데 애를 먹는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에 때로는 의도치 않게 가해자가 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범죄 노출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어릴 때부터 반복된 교육을 선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범죄 대상이 됐을 경우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정당한 자기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을 수 있도록 민형사 절차상 조력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가해자 대부분은 아는 사람

느린 학습자인 A씨는 다섯 달 동안 대학 동기 B씨에게 모두 895만원을 줬다. B씨는 A씨가 느린 학습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를 ‘현금지급기’처럼 여겼다. 살짝 몸만 부딪쳐도 “너 때문에 다쳤다”며 치료비를 받아갔다. “내 반지를 네가 잃어버렸다” “우리 엄마 수술비가 필요하다” 등 있지도 않은 사실을 날조해 돈을 뜯어 가기도 했고, 심지어 A씨 명의로 대출을 받거나 휴대전화를 개통하기도 했다. B씨는 결국 재판에 넘겨졌고, 1심 법원은 “지적 수준이 낮아 범행에 취약한 피해자를 상대로 약점을 잡아 반복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지적하며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A씨는 지속적인 협박과 갈취에도 저항하지 못했다.

최수진 느린소리 대표는 4일 “경계선 지능인들은 사람과의 관계에 목말라하는 성향을 보인다. 학창 시절부터 금전적으로 뭔가를 줘야 친구가 놀아준다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최 대표는 “청년대출 기준이 완화되면서 이를 악용하는 이들도 있다”며 “경계선 지능인은 학생 때는 학교폭력 피해자로 살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금전 문제와 관련해 가스라이팅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고 했다.

느린 학습자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범죄에 휘말리는 경우도 있다. 느린 학습자 C씨는 수억원대 보이스피싱 범죄에 이용돼 형사처벌을 받을 뻔했다. 금융회사 직원으로부터 “채권추심 담당 직원으로 채용됐다”는 연락을 받고 일을 하게 된 게 발단이었다. 금융회사 직원이라는 사람은 실상 보이스피싱 조직원이었다. 채권추심 업무는 보이스피싱 범죄 피해금을 수거하는 일이었다. C씨는 경찰에 체포된 후에야 자신이 보이스피싱 수거책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느린 학습자 자녀를 둔 장유민(가명)씨는 “구치소에 가면 느린 학습자가 많다고 한다. 뭔지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하다 보니 범죄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느린 학습자 아들을 둔 박미경(가명)씨도 “보이스피싱 범죄에 경계선 지능 아이들이 많이 연루된다고 들었다”며 “그런 얘길 들을 때마다 걱정이 된다. 아이에게도 반복적으로 가르치고 있지만 불안한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수사·재판서 권리 외면되기도

느린 학습자들은 범죄 이후에도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해 더 큰 곤경에 빠지곤 한다. 피해를 겪은 이들의 경우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어렵다 보니 수사기관이나 해바라기센터(성범죄 대응) 등에 의한 초기 조사 ‘골든타임’을 넘기기도 한다. 겉으로 봤을 땐 일반인과 같아 보이기 때문에 이렇다 할 지원을 받지 못하고 방치되는 일이 많은 셈이다.

범죄에 가담한 경우에도 수사와 재판에서 방어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장애인으로 등록되지 않은 탓에 조사 과정에서 쓰는 언어로 피의자의 지적 수준을 판단할 수밖에 없는데, 느린 학습자의 경우 기본 소통은 되기 때문에 지적장애인에게 적용하는 조사 매뉴얼을 적용하지 못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이 펴낸 ‘지적장애 피고인의 형사사법 절차상 처우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피의자나 피고인이 지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조기에 판단하는 건 권리보호를 위해 필수적인데, 경계선 지능인은 판별이 쉽지 않다.

C씨 역시 재판부가 느린 학습자로 판단하지 못했다면 해외 총책 검거가 어려운 보이스피싱 범죄 특성상 C씨 본인이 수억원의 피해보상 책임을 물었을 수도 있었다. 다행히 재판부는 “겉으로는 일반인처럼 소통하며 일상생활을 하는 데 무리는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리한 답변을 유도하는 변호인의 질문에 대해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며 “C씨가 범죄행위를 한다는 걸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무죄를 선고했다.

왜곡 없는 의사전달 이뤄져야

전문가들은 범죄에 노출된 느린 학습자를 위한 교육과 조력 제도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홍미영 박사는 “성교육 등으로 상황적 이해도를 높이는 훈련과 기능을 연마할 수 있는 직업훈련이 필요하다”며 “진술 조력인 등을 통해 왜곡 없는 의사전달이 이뤄질 수 있도록 지원체계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강원 법무법인 디라이트 공익인권센터 부센터장은 “피의자나 피고인이 된 경계선 지능인들이 자기방어를 못하고 처벌받는 경우가 많다. 범죄에 대한 명확한 인지가 없이 시키는 대로 하는데 형량 감경 등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진술 조력인은 피의자에게는 제공이 안 되는 데다 지인이나 가족이 수사 과정에서 동석하는 신뢰 관계인도 피의자에게는 의무사항이 아니어서 경계선 지능인은 혼자서 수사와 재판을 견뎌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재환 성윤수 기자 j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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