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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유엔총재야” 난 안 속을까… “치밀한 작업에 장사 없다”

[거대한 사기판 대한민국]

사기범들 정치인 기업인 등 사칭
자신을 포장하는 기술에 능숙
웬만한 사람들은 속아 넘어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마스크 수요가 전 세계적으로 폭증하던 2021년 7월 경북 구미의 한 공장에 강모씨가 모습을 나타냈다. 강씨는 자신을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에게 아시아 지역 마스크 1000억장 공급 임무를 일임받은 6인 중 1명이라고 소개했다. 멀끔하게 양복을 빼입은 그의 옷깃엔 ‘구테흐스 총장에게 직접 받았다’는 분홍색 철제 유엔 배지가 달려 있었다. 그가 만든 가짜 배지였다.

유엔 마스크 공급 아시아총괄담당 총재이자 유엔 차관급 인사라던 강씨는 비슷한 전과가 수차례 있던 사기꾼이었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3일 피해자 A씨에게 마스크 사업을 명목으로 13회에 걸쳐 6억4300여만원을 갈취한 혐의로 강씨에게 징역 4년6개월을 선고했다.

20일 국민일보가 판결문 등으로 살펴본 주요 사기사건의 공통점은 사기꾼이 정치인이나 기업인 등 권력자를 사칭한다는 것이다. 상대를 속이기 위해 정보를 위조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얼핏 보면 말도 안 되는 사기꾼의 속임수에 피해자는 속아 넘어갔다. 피해자들은 권력을 사칭해 자신의 욕망을 이뤄주겠다는 사기꾼의 허언을 철석같이 믿었다.

사칭은 나를 포장하는 기술

사기꾼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포장하는 데 능숙했다. 권력이든, 기관이든, 재력이든 자신이 잘 팔리게 꾸몄다. 서준배 경찰대 교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걸로 자신을 잘 포장한다. 학력이나 부, 권력으로 자신을 꾸민다”고 말했다.

사기꾼들은 일단 신뢰를 쌓은 뒤 본격적인 사기 범행을 저질렀다. 주변인까지 동원해 새로운 피해자들의 의심을 사전 차단했다. 피해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새 사기범죄에 가담하기도 했다.

국민일보가 확보한 ‘유엔 총재 사칭’ 강씨의 판결문을 보면 강씨 사기의 또 다른 피해자 B씨는 강씨 업체의 직원인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했다. 그는 이 사건 핵심 피해자인 A씨에게 강씨를 총재로 소개했는데, 이 역시 허위 영문 유엔 마스크 발주 문서를 보고 강씨에게 속아 벌어진 일이었다. B씨는 강씨에게 속아 마스크 업체를 만들었고, 강씨는 다시 이 업체 대표 직함을 달고 사기 행각을 벌였다.

“I am 신뢰예요”라는 메시지를 보냈던 전청조(27)씨도 비슷한 수법을 썼다. 그는 ‘파라다이스 그룹 혼외자’ ‘엔비디아 대주주’라고 사칭했다. 사기로 얻은 범죄수익으로 부를 과시했고, 펜싱 국가대표 출신 남현희(42)씨에게 접근했다. 공범 의혹을 받는 남씨는 펜싱 아카데미 사업을 주변 코치들에게 홍보하면서 전씨를 “돈이 굉장히 많다. 미국 IT 회사 계열 회장님이어서 SK랑 삼성보다 훨씬 많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실제 지위를 악용하거나 친분을 과장해 사기를 벌이는 사례도 끊이지 않는다. 하이브 산하 빅히트뮤직 소속 댄스 트레이너 C씨가 직원 등을 대상으로 수십억원 규모의 사기를 벌이는 데는 C씨와 하이브와의 관계, 그리고 BTS와의 친분이 있었다. C씨는 이를 이용해 신뢰를 얻었고, 피해자들은 그를 믿었다. 하이브는 이날 회사가 받은 피해에 대해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지난해에도 한 영화 제작 관련 엔터테인먼트 업체 강모 대표가 사기 계약을 꾸민 혐의로 1심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BTS 공연 계약 체결, 배우 김수현과 관련한 아시아 사업권 계약 명목 등으로 사기 계약을 체결했다. 실제 업체 대표인 강씨는 공범으로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이사를 사칭한 이를 동원하기도 했다.


오래 공들인다. 사기 아닌 프로젝트

전문가들은 사기꾼들이 치밀하고 지능적일 뿐 아니라 오랜 시간 집요하게 범행을 준비하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도 속아 넘어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들은 “특별한 가치가 있는 희소한 것을 너에게만 제공한다”는 식의 마케팅 전술까지 더해 피해자들을 낚는다.

지난해 말 전직 장관의 채권을 주겠다며 12억원을 뜯어낸 사기꾼 최모씨는 피해자가 산업금융채권에 관심이 있다는 걸 알고 범행을 계획했다. 최씨는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 전 부대변인이자 경기도의회 비례의원이었다는 점을 내세워 피해자에게 접근해 비자금 세탁 사기를 치려 했다. 그러나 피해자의 관심사를 알고 난 뒤 계획을 수정했다.

그는 범죄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 공범도 섭외했다. 최씨는 피해자에게 “산업금융채권을 갖고 있는 사람을 안다”며 공범을 소개했다. 이 공범은 자신을 박정희 정권 고위 공직자 비서라고 속였다. 이들은 1년여를 공들인 끝에 채권 사기로 피해자로부터 12억원을 뜯어냈다. 피해자의 고소로 재판에 넘겨진 최씨는 징역 2년을, 공범은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33년간 사기전문검사로 활동했던 임채원 변호사는 “사기꾼은 상대방의 지적 수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돈인지 명예인지, 상대방이 현재 가장 아까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살피면서 조준한다”며 “그들은 ‘사기쳤다’고 안 하고 ‘프로젝트를 완성했다’고 말한다. 그만큼 치밀하게 준비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사기꾼들은) 4년에 걸쳐서 작업하는 경우도 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하다가 어떤 권력, 힘을 보여주면 최면에 걸린 것처럼 속게 된다”고 강조했다.

김용현 이가현 나경연 기자 fac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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